함께. 가끔은 대형 서점에 들려 아직은 불투명한 미래를 머리 속에 그리며 책을 뒤적이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수업을 일찍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홀로 책상 앞에 앉아 한적한 오후를 만끽하며 감상에 젖어 글을 끄적이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무엇 하나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언제나 마음만은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불안했지만, 두렵지는 않았던, 나의 20대. 여전히 내 기억 속에선 가느다란 빛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잠이 늘었다. 조용한 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집. 아니, 아무도 없는 집. 혼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쓴 글을 지우고, 또 다시 쓰고, 또 다시 지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나는 백지 앞에 앉아있다. 불안하지는 않은데, 이제 조금은 두렵다. 어쨌..
시간. 엑셀 파일 하나, 그것도 단 한 장의 스프레드시트를 완성했을 뿐인데 벌써 저녁이다. 자그마치 8시간이나 소요된 작업. 행여나 물거품이 될까봐, 이미 중간중간에 여러 번 눌렀지만, 퇴근하기 전 디스크 모양의 저장 버튼을 또 한 번 더 꾹 누른다. 반복된 작업으로 그새 굳어진 손가락을 이리저리 펴고, 기지개를 편 후, 머그잔 바닥에 갓 눌러앉은 검은색 커피딱지의 진한 향을 한 번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시간이 눈에 보일 만큼 빠르게 흘러간다. 엑셀 파일 한 장에 담긴 나의 하루가 저문다. 퇴근할 시간이다.
공명. 텍스트에 문학적 감성을 불어넣지 못한다면 그 텍스트는 그저 텍스트로 남는다. 내가 좋아하는 글은 건조한 정보 전달 목적을 훌쩍 넘어서는 글이다. 나는 그런 글 읽기를 즐기고 사랑한다. 글쓴이의 컨텍스트가 읽는이의 컨텍스트가 되는 글. 글을 읽고 나면 텍스트가 아닌 컨텍스트가 남는 글. 문학적 감성은 가식적인 기교가 아니다. 의식 이면에 가라앉아 있던 무언가를 공명시켜 수면 위로 끄집어내는 작업이다. 경험했으나 의식의 처리과정에서 배제되었던 기억들, 혹은 직접 경험하지 못했어도 오감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던 기억들, 때로는 직간접적 경험과 상관없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유하는 공감대를 건드려, 글쓴이의 컨텍스트가 그가 길어올린 텍스트를 통하여 읽는이의 컨텍스트를 공명시키는 일이..
반복을 넘어선 성실의 힘: 멈춤의 중독성을 넘어서. 멈춤은 필요하다. 멈출 때 비로소 찾아오는 낭만과 여유는 미약하나마 현실에서 다시 마음을 다잡는 역할을 충실해 해낸다. 그러나 반복이 만들어내는 무뎌짐 속에서 그 역할은 과연 얼마나 힘을 가질까. 거리가 생겼을 때에야 비로소 찾아오는 낭만과 여유의 힘을 의심하기 시작할 무렵은 어쩌면 우리가 또 하나의 알을 깨고 나오는 시기가 될 수도 있다. 거리는 현실과의 괴리다. 현실과 동떨어진 낭만과 여유의 힘은 잠시 쉬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반성과 성찰의 효과를 낼 수는 있지만, 결코 다시 돌아온 현실에서 같은 크기와 같은 수명을 가지진 않는다. 특히, 우리네의 짧은 인생이 그런 과정을 수없이 반복할 정도로는 충분히 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시간이 가지는 힘은..
실천의 현실성. 살면서 언젠가는 감당하기 힘든 용서를 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단단히 각오를 해야하는, 결코 쉽지 않은 용서. 모든 과거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릴 것만 같아 두렵기도 하고, 모든 걸 잃어버릴 것만 같아 무거운 용서. 도저히 불가능할 것만 같은 용서 앞에 우리는 맨발로 서게 된다. 하지만 덮어줘야 할 과거를 지닌 사람. 그의 진정성 있는 새로운 시작을 나는 응원하련다. 믿어보련다. 용서를 베푸는 것도 사랑이지만, 용서 후에 상대방의 치유되지 않고 여전히 모난 면을 인내해 가며 함께 가는 것 역시 사랑의 힘이다. 그 믿음에 또 배신을 당할지도 모르지만, 사랑은 그것까지도 감내한다. 믿음과 사랑은 성공이나 효율과는 애당초 관계가 없는 것이기에, 인내하는 지난한 과정이 어쩌면 믿음과 사랑의 ..
흩어진 조각이 길이 되다. 대수롭지 않은 사건의 단편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 의미를 갖기 시작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냇가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있던 작은 돌멩이 하나하나가 일어나 길이 되는 모습. 돌들이 일어난 게 아니라 수면이 얕아진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건 그 인고의 세월. 그 세월을 버텨온 작고 힘 없는 돌멩이들의 존재. 과거에 시간을 더한다고 현재가 되는 게 아니다. 크고 중요한 선택과 결정이 지금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지금의 나는 어쩌면 작고 하찮은 모습으로, 하지만 끝까지 버텨낸 일상의 조각들이 모아져 얼키설키 짜맞춰진 퍼즐일지도. 누군가의 손에 의해. 나도 아직 모르는 어떤 의미를 내는.
같이 있어주는 일. 아파서 정신 없이 자다가 눈을 뜬다. 찌푸둥한 몸, 개운치 않은 머리. 아직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에 한없이 기운이 빠진다. 좌절과 절망. 그리고 자책까지. 단 1초만에 밀려드는 생각이다. 그때다. 옆에 몸을 구부리고 불편하게 잠들어 있는 아내를 본다. 아, 난 혼자가 아니었다.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던 걸까. 북받쳐오르는 가슴. 감동이 밀려온다. 사랑을 느낀다. 사랑이 보인다. 사랑이 바로 여기 있다. 같이 있어주는 일. 결코 효율적이지 않은 일. 모든 몸과 마음이 소요되는 일.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비생산적인 일. 그러나 꼭 필요한 일. 가장 필요한 일. 사랑하는 사람이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일. 사람 살리는 일은 어쩌면 내 것을 잃으면서도 그것으로 뭔가를 얻어내는 일이 아니다. 그..
해소: 공감의 자리로. 쓰러졌을 때 올려다 본 맑은 하늘을 기억한다. 머리가 가장 낮은 땅에 닿았을 적 나무 사이로 구름 위로 끝없이 펼쳐져 있던 하늘. 우울한 기분에 밖을 나섰을 때 맞이한 화창한 날을 기억한다.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세상은 잘도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느꼈던 불편함, 스스로 이방인이 된 이질감. 변하지 않은 것들의 잔인함. 밝고 맑은 것들의 매정함까지도. 모두 기억이 난다. 이러한 모든 감정은 나에게 각인된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의해 굴절된 해석일 뿐이라는 것도 난 이제 안다. 과연 성숙해진 것일까. 맑은 하늘과 내 눈 사이를 가리었던 눈물도, 나의 우울한 기분과 화창한 날씨 사이를 가리었던 음울한 기운도 모두 한 편의 슬픈 이야기로 사라져버린다. 소박한 ..
배드민턴. 복학 후, 남아있던 1년 반의 학부를 마치고 나는 별 망설임 없이 같은 학교 대학원을 지원했다. 2002-3년 겨울이었다.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었고 과학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체감하며 연구에 올인했다. 정말 즐거웠다. 그때가 내가 가장 사이언스를 즐기고 사랑했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즈음부터였다. 실내체육관에서 배드민턴을 치기 시작했던 때는. 나 역시 그 전까지만 해도 동네 약수터 배드민턴이 배드민턴의 전부인 줄 알았다. 코트에서 룰을 지키며 셔틀콕과 라켓이라는 것에 돈을 지속해서 지출해야만 하는 운동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 재미로 치는 것에 불과했던 배드민턴이 시간이 갈수록 흥미진진해져 갔고, 함께 치던 동료들 사이에서도 경쟁심 비슷한 긍정..
흐린 날의 궁시렁. 아무래도 흐린 날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보다 더 감상적이게 된다. 586 세대들은 이런 날이면 동동주나 막걸리를 떠올렸겠지만, 96학번이라 그나마 끄트머리에서 겨우 가능할 수 있었던 그들과의 접점도 내가 몸담은 대학의 지리적 환경적 특수성 때문에 나는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에겐 동동주나 막걸리에 대한 감상이 아쉽게도 전혀 남아있지 않다. 그저 학과 신입생 환영회에서 막걸리 사발식을 하고 차가운 회의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한동안 정신을 못차렸던,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만이 가느다랗게 맞물려 있을 뿐이다. 특히 여기 서던 캘리포니아에서 흐린 날은 다른 지역에 비해 자주 경험하기 힘들기 때문에, 바깥이 흐리면 ‘정상적’이지 않은 날로 여겨질 정도다. 오늘이 그렇다. ..
내 안의 타자. 함부로 정의할 수 없는 어떤 내밀한 이끌림 때문인지, 새로 길들여진 습관 때문인지, 난 오늘도 강요되지 않은 선택을 한다. 일부러 시간을 내고, 그 시간에 맞추어 게으른 몸을 움직인다. 늘어지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숙연해지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높은 천장, 넓은 공간,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 그리고 평온한 적막. 소란했던 내 마음엔 이내 평안과 고요가 잦아들고, 나는 다시 한 번 경건한 자가 된다. 높았던 마음이 낮아지고 내 안의 혼잡했던 찌꺼기들이 씻겨나가는 것 같다. 또 다른 나와의 만남. 같은 육체를 공유하고는 있지만 내 안엔 또 다른 나, 내 안의 타자가 있다. 타자를 환대하는 것은 외부만을 향하지 않는다. 자신의 고집된 방식에 잠시 제동을 걸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
눈이 깊어지는 과정. 모든 상처는 고유한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연쇄반응을 일으켜 한 사람의 고유한 컨텍스트를 이룬다. 이는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함부로 던져진 교훈과 책망이 자칫 폭력으로도 작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좋은 씨가 좋은 역할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좋은 토양이라는 환경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씨라도 나쁜 토양에 떨어지게 되면 그 영향에서 완전히 독립적이기는 불가능하다. 뿌려진 씨에게 지속적인 영양분을 공급하는 공급자는 어쨌거나 그 토양이다. 만남이 겉핥기식 단계를 벗어날 무렵이면 그 만남은 곧 나의 상처와 상대방 상처와의 만남이 된다. 컨텍스트와 컨텍스트의 만남, 두 세계관의 충돌. 그러므로 어떤 만남이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은 신비다. 충돌을 넘어서는 것은 곧 초월을 의미하..
특별함으로 대체할 수 없는 평범한 일상의 빈 공간. 한국에 부모님이 계신,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비애 중 하나는, 언젠가는 부모님의 임종과 관련된 전화 한 통을 기다리는 운명이라는 점이다. 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명백하게 존재할 그날을 기다리는 상태에 한인들의 비애가 있다. 특히 연세가 평균 수명인 80세를 넘기신 부모의 경우, 새벽에 문득 걸려오는 전화벨소리는 모든 걸 얼어붙게 만들 정도의 힘을 가진다. 혹시 오늘이 그날이려나 하는, 섬광처럼 온몸을 스치는 생각. 그 두려움. 그래서 많은 한인들은 일년에 한 번 정도 한국을 방문한다거나 부모를 미국으로 초청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경제에 여유가 있다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충분히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계획이다. 그러나 많은 한인들은..
위기와 유머. 위기에 봉착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문제를 진지하게 대면하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 문제를 필요 이상으로 너무 진지하게 대면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진지함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유달리 지나친 진지함이 폐해가 될 때가 의외로 많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진지함은 우리를 경직시켜 유연한 대처를 막는다. ‘집중’의 어두운 면이다. 마음의 여유뿐 아니라 상상력을 제한시키고 갉아먹는다. 얼굴은 잔뜩 찌푸린 채 마치 세상이 금새 두 동강이라도 날 것만 같은 표정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 원인을 찾아내고 분석하여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 되어버린 상태. 여기서 나는 묻고 싶다. 만약 그 목적을 달성하면 그 다음은 어쩔 거냐고. 문제의 연속성 안에서 허구한 날 심..
상대성. 무언가를 막 끝냈을 때에만 찾아오는 독특한 무료함이 있다. 하릴없이 빈둥댈 때와는 다른. 뭐랄까. 관성의 잔상이랄까. 한동안 계속해서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멈춰버린 물체는 여태껏 멈춰있던 물체와는 분명 다를 것이다. 같아 보이지만 다르다. 과거의 흔적은 현재 정지한 물체의 어딘가에 분명히 남아 있기 마련이다.멈춤이라고 해서 다 같은 멈춤이 아니다. 멈춤에도 맥락이 있다. 멈춤의 미분계수. 그 멈춤 이후에 상승할지 하강할지 알 수 있는 값. 멈춤의 순간기울기. 이는 현재의 순간을 나타내는 지표이지만, 동시에 과거의 궤적과 미래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교차점이기 때문이다. 결코 시간은 불연속적이지 않다. 움직임은 외부에서 그 물체를 보는 관점에서의 ..

사소함의 신비. 커다란 홀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중앙에는 누군가가 갖다 놓았는지 모를 티비 하나가 켜져 있었다. 붉은 머리의 한 여인이 머리칼을 휘날리며 차를 몰고 한적한 시골길을 미끄러지듯 달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소음 때문인지 나는 미미한 공황이 오기 시작했기에, 멍하니 쳐다보던 티비에 괜스레 집중하며 시간을 떼우고 있었다. 티비 소리는 누군가 일부러 줄여놨는지, 모기 소리처럼 작아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에,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도 모르면서 움직이는 화면을 가만히 뚫어지게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몇 초간 얼어붙게 만든 건 다행히 소리가 아니었다. 문득 수 년 전, 티비에서 나오고 있는 길과 아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마치 끝도 없이 ..
거짓 지혜자. 특별함이 사라지면 평범함만 남는다. 하지만, 평범함이 사라지면 특별함도 함께 사라진다. 근간이 사라지면 거기엔 텅 빈 공간만 남는다. 특별함의 존재 이유는 평범함이다. 반복되는 일상의 과소평가는 그것의 무게를 인지하지 못한 무지함이다. 잠깐 빛나는 찰나를 위해 지난한 일상을 견디고 참아내야 한다고 가르쳤던, 옛 거짓 지혜자의 말이 떠오를 때면 나는 종종 분노하곤 한다. 그러나 나도 딱 거기까지. 그 작자들의 가르침이 내게 달콤한 지혜로 들렸던 이유는 바로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자기애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불의는 지혜로 비춰질 수 있었고, 내가 선택한 위선은 군중의 익명성과 관행으로 충분히 해석되어질 수 있었다. 거짓 지혜자는 누군가에게 받는 훈련만으로 탄생하..
Labor day. 한적한 도로. 느지막이 나선 출근길에는 차가 거의 없다. 오전 11시. 바깥 온도는 벌써 화씨 90도를 가리키고 있다. 모든 게 따뜻한 그림 같은 배경이 되고, 나만 그 정지한 시공간을 유유히 움직이는 유일한 존재인 것 같다. 오늘은 Labor day. 공휴일이지만, 그래서 더 게으르고 싶지만, 늦잠 정도로 만족하기로 하고, 난 주저없이 연구소에 나왔다. 목요일에 있을 학과 전체 세미나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연중행사라서 준비를 잘 해야만 한다. 이번에는, 3년이 넘도록 진행하고 있으며 보스까지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프로젝트를 정리해서 발표할 예정이다. 클리블랜드에서 대면한 인생의 낮은 점과 인디애나에서 맞이한 인생의 변곡점을 지나는 여정 중에 과학자인 내게 처음으로 들어온 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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