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함을 좋아하면서도 막상 진정함을 마주하게 되면 피하고 마는 사람. 순수함을 갈망하면서도 막상 순수함을 마주하게 되면 마치 일부러 자신은 순수하지 않은 사람이란 걸 보여주려는 것처럼 과장하는 사람. 그 이면에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는 이러한 사람들. 난 이들을 비겁하다 말한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멋적게 보이고 싶어하는 껍데기를 아직도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여, 이젠 뒤돌아서서 '흥, 뭐 나도 안다고.' 하는 시나리오는 지겹지 않은가. 그저 남들의 성공을 구경하며 박수쳐주는 선한 이웃이 될 수는 있으나, 그댄 결국 구경꾼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은 산 정상에 올랐을 때 희열을 느낄거라 한다. 하지만 내가 정상에 올랐을 땐 감격보단 외로움이 먼저 찾아왔다. 정상을 탈환했다는 기쁨 같은 건 솔직히 거의 없었다. 너무나도 잠잠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산 봉우리들과 숱한 나무들, 그리고 지저귀는 새들까지도 마치 나에게 인간은 나 혼자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다. 정상에 오를 때면 난 언제나 외로웠던 거다. 그러나 산 정상을 뒤로 하고 산을 내려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안도감과 함께 그제서야 느꼈다. 최고의 자리에 섰었다는 감격, 그리고 외로움이 아닌 함께 하는 기쁨까지. 정상에 서는 것 만으로는 완성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없지 않을까. 그 자리를 뒤로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늘 있던 자리로 돌아와 감사함으로 그 감격..
중국인 포닥이 나와 얘기할 때면 늘 빼놓지 않고, 마치 나에게 각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하는 말이 있다. 어메리카는 인정사정없고 냉정해서 서바이벌 게임과도 같다는 거다. 일년안에 논문을 내지 못하면 발로 차여 내쫓긴다고 겁을 준다. 심지어 PI도 논문이 없어서 짤리고 랩이 문을 닫는 경우도 왕왕 봤다고 한다. 자기도 그러한 랩들 하나에게 여기로 온거라면서 말이다. 살아남기라... 대여섯번 들었을 때만 해도 남 얘기려니 했었는데 올해 들어 벌써 몇번 실감을 한다. 적어도 과학에 있어선 내 손과 머리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곤 있었지만 별안간 느껴지는 그 느낌. 따뜻한 인간성, 정이라는 단어는 전혀 찾아 보기 힘든 그 느낌. 무언가에 배신당한 것 같은 그 느낌. 갑자기 어느샌가 혼자 덩그러니 떨어져버린 듯..
난 아직 잘 모른다. 아니, 아는 게 거의 없다고 말해야 더 맞을 듯 하다. 많이 안다고 여겼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훌쩍 커져버린 이 깊은 구렁텅이. 하소연도, 그 어떤 한숨도 이젠 용납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진심조차도. 그냥 모든 걸 잡아삼키는 블랙홀만 같다. 오해, 변명, 사소한 말다툼도 저 멀리멀리 날아간다. 아무런 생각도 잡히질 않는 이 상태. 공허, 허무, 이어지는 절망감만이 내 가슴 속에 가득하다. 모두 버리고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면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론 그래봤자 하는 마음도 자꾸 날 가득 메운다. 과연 난 잘 해낼 수 있을까.
누가 뭐래도 불평과 불만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 생명체는 없으리라. 답답하고 억울한 가슴을 씻고 싶은 마음에 털어놓은 짧은 하소연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상대방에게 남기는 임팩트는 무시할 수 없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 불평은 또다른 불평을 낳고 불만은 또다른 불만을 낳는다. 운좋게, 아님 완벽한 계획으로 넓은 아량의 사람을 만났다 하더라도 마찬가지. 상대방 마음의 여유가 많고 적음은 불평과 불만을 받아 들이냐 못 받아 들이냐를 결정짓는 잣대가 아니라 얼마나 그 불평과 불만의 인풋을 새롭게 진화된 제2의 불평과 불만의 아웃풋으로 표현을 하냐 못하냐를 결정지을 뿐이다. 뿌린 이상 거두게 되는 건 뿌린 사람이나 그 씨가 심긴 사람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즉, 불평과 불만이 계..
누군가를 무시한다는 건 무슨 말일까. 단순히 상대방을 높여주지 않는다는 걸까.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방을 곤란하게 만들 악한 동기를 가지고 그 사람을 업신여긴다는 걸 의미하는 걸까. 아마 이것도 아닐 것이다. 보다 정확한 의미는 아마도 무의식적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을 포함한 기타 여러가지 방법으로 상대방에게 약간이라도 불리할 수 있는 표현을 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달리 말하자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의 전적인 의지나 말과 행동이 '무시'라는 뜻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거다. 어쩌면 그러한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오해 또는 착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십중팔구 자신의 과거 상처에 연루된 열등감의 표출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무시하는 말을 한 사람이 자신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여긴 인천 송도다. 거의 2년 정도 적을 둔 곳이기도 하지만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송도를 낯설게 느끼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는 것 같다. 오늘도 강남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비내리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니 내가 여기서 생활했었다는 사실까지도 전무하게 느껴진다. 비단 높은 빌딩들이 하루 속히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예전에 보이지 않던 조그만 가게들이 하나씩 보일 때도 나의 왠지 모를 이 낯선 기분은 식을 줄을 모른다. 내가 또 여길 찾게 될 일이 있을까. 이젠 한국에 머물 날이 한달도 남지 않았는데 말이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섬. 송도 신도시. 내 기억 속에서도 언젠간 사라지고 말테지. 짧은 기억의 아쉬움만 남기고, 안녕.
만남이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축복 중 하나라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테다. 하지만 만남이란 게 자기 의지대로 시작하고 끝낼 수 없다는 생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만남이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축복도 아닌게다. 내게 선물로 왔던 여러 만남들 가운데 유독 참 스승과의 만남이 결핍되어 있다는 건 참 아쉬운 일이다. 누군가는 내게 그 스승을 만났었지만 내가 모르고 지나친게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난 아직도 참 스승을 만나고 섬기며 배우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다. 겉모습의 허울이 많아 한껏 여론에 의해서 부풀려진 그런 스승 말고, 실제론 다른 곳에 동기가 있음에도 화려한 과거의 스펙으로 포장해서 마치 그럴듯한 포즈 취하는 걸 즐기는 그런 인간 말고 말이다.
성공을 위해서 자신의 장점을 키우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단점을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상반되는 두 캐릭터는 다른 사람을 도와줄 때도 그대로 드러난다. 전자의 경우, 도와줄 상대의 단점이 보여도 그 사람의 큰 장점들이 그 단점들을 보완해 주리란 생각으로 단점들을 그다지 크게 보지도 않고 실제로 그것들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허나, 후자의 경우는 상대방의 단점 보완에 초점을 맞추고 그 사람을 대하기 때문에 전자의 경우보단 상대적으로 부정적으로 보일 가능성이 높다. 하나하나 단점들이 보일 때마다 상대를 도와주려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먼저 스트레스를 받아 상대를 도와주기는 커녕 도움을 받아야할 상대에게 허구한 날 쓴 소리만 해대는 어처구니 없는 결..
뛰어 놀기서부터 농구, 배드민턴을 거치며 거의 매일같이 운동을 즐기던 일상이 아이 중심의 생활체제로 바뀌면서 갑작스럽게 무너져 버린지도 벌써 3년이 다 되어간다. 중간중간에 부쩍 늘어버린 체중을 한탄하며 다시 배드민턴 라켓을 잡기도 했었지만, 육아의 중요성과는 도저히 바꿀 수는 없었다. 이제 출국이 두달도 채 남지 않았다. 준비할 게 이것저것 있지만, 중요한 사실은 아무리 철저히 준비한다 해도 새로운 환경에 직접 가게 되면 여기서는 도저히 예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한다는 것. 그러므로 생활의 편리를 위해 이것저것 눈에 보이는 것들을 생각하고 고민하며 챙기는 것 보단 낯선 세상에서의 변화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강한 마음가짐 그리고 큰 문제가 와도 받아낼 수 있는 마음의 큰 그릇을 준비하는 게 중요하..
'잃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버린다는 것'은 결국 내 손에서 사라지는 결과는 매한가지이겠지만, 슬픈 일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후자에게는 의지라는 게 담겨 있어서 일게다. 즉, 버린다는 것은 능동적인 잃음이라고 해야 그래도 엇비슷하게 의미를 전달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잃는다는 것은 수동적인 빼앗김으로 대치될 수 있는데, 어찌 보면 그저 슬픈 일이라기 보단 억울함이 내재된 어쩔 수 없는 치욕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다. 말장난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 잃는다는 것과 버린다는 것의 차이는 이렇듯 극명한 게 틀림 없다. 그렇다면 이번엔 lose의 측면이 아닌 gain의 측면은 어떨까. 그런데 재미난 것은 잃는다는 것의 반대말은 얻는다는 것이지만, 버린다는 것의 반대말은 존재하지 않는..
내 나이 서른 중반에 접어들어서야 '묵인'의 힘을 비로소 알게 된다. 군중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무언의 인정, 묵인. 비록 알고도 넘겨 버린다는 의미를 가진 말로도 해석이 되지만, 넘겨 버린다는 자체가 벌써 '인정'의 힘을 지니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더욱이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무언의 인정에 동참하는 이른바 '암묵적 묵인'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힘을 내재하고 있다. 어쩌면 원만한 인간관계의 핵은 바로 여기, 암묵적 묵인을 얼마나 교묘하게 잘 소화해 내는가에 달려 있다 해도 무방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암묵적 묵인은 일자리도 창출해 낸다. 언젠가부터 일자리라는 개념은 너무나도 많이 변질이 되어 다만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어도 그것은 곧 일자리로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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