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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읽고 쓰는,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가난한 사람들’을 다시 읽고

독서모임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의 태동과 함께 드디어 시작된 나만의 소소한 프로젝트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는 예전에 한 번 읽고 감상문을 남겼던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을 출간 순으로 다시 읽고 다시 감상문을 남기는 과업이다. 이른바 ‘재독 프로젝트’. 앞으로 약 2년 간 지속될 예정이다. 그 첫 작품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선정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도스토옙스키를 문단에 데뷔시킨 첫 소설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 작품처럼 화려한 데뷔를 바라진 않는다. 그저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까지 묵묵히 전진하고 싶은 마음이다. 

3년 전 초독할 때의 나와 지금 재독을 마친 나 사이엔 수백 권의 문학, 철학, 신학, 인문학 책과 그 일부를 글로 남긴 150여 편의 감상문, 세 권의 저서와 한 권의 번역서, 그리고 짧은 글이 소개된 두 권의 책이 있다. 모두 작가로서의 가시적인 열매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과연 나의 성장과 성숙을 이뤄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다만 나는 읽고 쓰기가 일상으로 잦아든 사람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성실히 지속되는 ‘읽기와 쓰기’는 지금의 나를 빚은 조물주의 손의 일부라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 달라졌을 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초독 땐 ‘가난’이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재독 때 내 시야는 확장되었다. ‘문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책’ 혹은 ‘독서’ 혹은 ‘읽기’에 주목했다. 가난 때문에 극빈층에 속한 두 사람이 너무나도 현실적인 대화들을 애절하게 편지로 주고받은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 가운데 빠짐없이 등장하는 책이라는 매개체에 내 관심이 집중되었다. 감상문을 쓰기 위한 밑작업으로 책에 밑줄 그은 부분을 추려보니 거의 모두가 책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돈이 아닌 책, 경제적 위기가 아닌 문학적 빈곤 (이 표현은 번역을 담당했던 석영중 교수가 사용한 단어이다)으로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다시 읽게 된 것이다.

읽기, 그러니까 내가 주목한 책에 관련된 부분은 세 군데다. 첫 번째, 바르바라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면서 뽀끄로프스끼의 방을 몰래 찾아가 그가 사들인 책들을 보며 느낀 충동을 묘사하는 장면이다. 다음과 같다. 

”어떤 광기 같은 것이 나를 엄습해 왔다. 나는 그의 책을 마지막 한 권까지 전부 다 읽고 싶었다. 그래서 아주 빠른 시간 안에 꼭 그렇게 하고 말리라며 그 자리에서 마음을 먹었다. 나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나는 그가 아는 것을 나도 다 알아야 그와 우정을 나눌 자격이 생기는 거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바르바라를 통해 묘사한 이 장면에서 도스토옙스키는 ‘광기’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어떤 한 사람을 마음에 품는 충동적인 순간을 매개하는 것이 책이라니! 그 사람이 읽은 것을 모두 읽고 싶고, 그 사람이 아는 것을 모두 알고 싶은 그 마음. 그래야 비로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마음. 아, 이를 광기가 아니면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왜 이런 마음에 공감이 가는 걸까. 이성 혹은 지성을 대표하는 책이라는 것이 광기 어린 감정의 폭발 장면에 고스란히 쓰이다니! 책을 사랑하는 나 같은 사람의 마음도,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모두 읽어내고야 말겠다는 나의 다짐도, 그리고 그 작품들을 재독하겠다는 다짐까지, 이것들 모두는 어쩌면 이 ‘광기’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그 무엇 아닐까. 

두 번째, 바르바라가 어머니 옆에서 병간호를 하던 중 뽀끄로프스끼가 빌려준 책을 읽던 소회를 언급하는 장면이다.

“처음 나는 잠이 들지 않기 위해서 책을 읽었고, 시간이 좀 지나자 진지하게, 그리고 나중엔 책 속으로 몰입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낯설고 새로운 것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내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느낌들이 거센 물결처럼 한꺼번에 가슴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런 흥분이 거세어질수록, 새로운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이 당황스럽고 벅찰수록, 나는 점점 더 깊이 그 낯선 느낌에 빠져 들었고, 그 느낌은 점점 더 달콤하게 내 영혼을 뒤흔들어 놓았다.”

책이란 존재가 영혼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여 영향력을 발휘하는 순간을 경험해 본 사람은 공감할 것이다. 나 역시 한때는 바르바라였다. 이전에 알지 못하던 것들을 알게 되며 눈이 떠지는 과정, 그리고 바로 그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 그 순간의 감흥을 나는 감히 기적이라 표현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며, 동시에 타의에 강요되지 않은 자발적인 깨달음만이 그나마 약간의 기대를 걸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변화의 유일한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세 번째, 뽀끄로프스끼의 죽음 직후 그의 아버지가 집주인으로부터 아들이 소장했던 책들을 무작위적으로 확보하는 장면, 그리고 그렇게 주머니에 넣으면서 확보한 책들이 아들의 관을 싣고 가는 마차를 따라가는 동안 주머니에서 떨어지는 장면이다. 도스토옙스키가 묘사한 아버지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노인은 그녀와 말다툼을 하고 소란을 부리면서 뺏을 수 있는 만큼 책을 빼앗아 옷에 달린 주머니란 주머니에 모두 쑤셔 넣고, 모자 안에도 넣고, 그 밖에 넣을 수 있는 곳에는 다 넣었다. 그리고 사흘 내내 그렇게 가지고 다녔다. 심지어는 교회에 갈 때조차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 며칠 동안 그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 같았다. 바보라도 된 것처럼 비정상적인 분주함을 보이며 관 주위를 줄곧 왔다 갔다 했다.”

“노인은 궂은 날씨도 느끼지 못하는지 마차 이쪽저쪽을 번갈아 달리면서 울부짖었다. 그의 낡은 프록코트 자락이 날개처럼 바람에 펄럭였다. 옷에 달린 주머니에서는 온통 책들이 비어져 나왔다. 그가 내내 꼭 쥐고 있던 커다란 책은 여전히 손에 들려 있었다. 길 가던 사람들은 모자를 벗고 성호를 그었다. 어떤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가여운 노인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주머니에선 계속 책들이 빠져나와 진흙탕 속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이 그를 멈춰 세우고 떨어뜨린 물건을 가리켜 보였다. 그는 그것을 주워 들고 다시 관을 쫓아 달렸다.”

이 장면을 읽는 동안 나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아버지의 그 처절한 모습이 내 마음 깊숙한 곳을 찌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갑자기 아들을 먼저 보낸 그 마음으로 가득한 아버지에게 아들이 남긴 책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책을 사수한다는 건 곧 아들의 명예를 지킨다는 것과 다름없지 않았을까. 그런 책들이 진흙탕 속으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그것을 주워 들고 다시 아들의 관을 쫓아 달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건 무엇이었을까. 모든 걸 잃는다는 건 바로 이런 상황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나중에 아들을 묻고 아버지는 그 책들을 어떻게 다뤘을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진흙이 묻어 더러워져도, 찢기고 구겨져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책은 이미 책을 넘어 아들의 흔적, 아니 아들 그 자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책은 바르바라의 경우처럼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기도 하고, 뽀끄로프스끼의 경우처럼 그 사람 자체를 대신하기도 한다. 비록 사물이지만 하나의 힘을 가진 존재자로서의 의미까지 가지는 책. 도스토옙스키는 이러한 책의 의미를 그 누구보다도 깊이 파악하고 있었던 듯하다. 단돈 몇 루블에 인생이 지옥과 천국을 오갈 수 있을 정도의 궁핍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책은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추억이 되기도 하며 그것을 살아내는 사람의 성장과 성숙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이 작품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극빈곤층에 속한 바르바라와 마까르, 그리고 뽀끄로프스끼에게서 가난이 아닌 책에 주목함으로써 그들의 살아 있음을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이에 반해, 책 말미에 바르바라와 결혼을 하게 되는 비꼬프의 경우는 비록 수중에 돈은 있어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지만 책이 없는 삶을 살며 책을 무시하고 악마화시키는 존재로 묘사된다. 이는 곧 책이 인간의 삶을 인간다운 삶으로 만들어주는 힘을 가진다는 점을 보여주는 도스토옙스키의 장치이지 않았을까. 가난하지만 살아있는 삶, 그리고 경제적 여유가 있지만 이미 죽어버린 삶.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내고 싶은 걸까. 이 질문 앞에서 쉽게 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도스토옙스키가 든 두 가지 유형이 너무나도 극단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책도 원하고 돈도 원하는 욕심 많은 내가 내 안에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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