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 롤러 클리블랜드 시절은 나에게 크고 작은 정신적, 육체적 흔적을 남겼다. 그중 하나가 수면 장애다. 2014년 즈음부터 나는 깊은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어릴 적엔 머리만 대면 5분 이내로 잠이 들었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도 나는 잠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다. 그러나 지금은 일 년 중 잠을 잘 잤다고 느끼는 날이 겨우 손꼽을 정도다. 거의 매일 밤 나는 잠들기 전 한 시간 안팎을 뒤척인다. 설상가상인 것은 잠이 겨우 들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두세 시간마다 나는 잠에서 깬다. 정확히 한 시간 단위로 잠을 깨어 시계를 보며 나는 내가 미친 뻐꾸기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종종 깊은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덫에 걸린 듯한 심정이 되는 것이다. 아내가 2년가량 일찍 한..
나를 넘어서 오르기 힘든 산에 오르면 무엇이 보이고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누군가는 자연이 제공하는 절경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도취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한 단계 더 나아가 그것들을 창조한 존재를 찬양할 수도 있다. 하지만 또 누군가는 시선을 내부로 돌려 연민 어린 시선으로 그동안 잘 돌보지 못했던 벌거벗은 자아를 대면하고 깊은 위로와 치유를 경험할지도 모른다. 비단 힘든 산행만이 아니다. 모든 육체적 고행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동일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요컨대 진정한 나를 찾는 과정이다. 진정한 나를 대면하는 경험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전율을 느낄 정도로 벅찬 감정과 깨달음의 홍수에 잠기게 만든다. 그리고 이 경험은 중독성이 있어 또 경험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들게 만든..
침투하는 빛 축복이란 당당하게 대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오는 장군의 모습이 아닌, 문틈에 난 작은 균열을 통해 침투하는 빛으로 찾아온다. 우레와 같은 소리가 아닌 세미한 음성으로, 폭풍우가 아닌 가랑비로 어느새 우리 곁을 찾아온다.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도 오늘이 어제와 다를 수 있는 이유 역시 나는 이러한 균열들 덕분이라 믿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우리는 그런 균열을 원하지 않는다. 균열이 가진 부정적인 이미지, 즉 부서졌거나 망가졌다는 이미지가 떠올라 현 상태 유지에 방해가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현 상태에 안주하려는 게으름과 그 상태가 발전할 필요가 없이 최고이고 최고여야만 한다는 은연중 믿음에 기인한다. 이는 정착 기간이 길어질 때 인간이 보이는 전형적인 패턴이기도 하다. 그렇..
예상 밖의 순간들 실패와 같은 예상 밖의 상황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풍성한 삶은 바닥이 나고 말 것이다. 풍성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은 그러므로 반드시 실패를 두 팔 벌려 환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흥미를 느끼고 새로운 인사이트와 아이디어를 얻으며 수정된 방법으로 다시 시도를 해보는 용기도 필요하겠다. 그렇게 할 때 실패는 실패로 끝나지 않고 과정의 일환이 되며, 마침내 얻은 성공 역시, 비록 드물게 찾아오긴 하지만, 하나의 과정으로 자리매김한다. 성공을 위해 나아가지만 성공만을 위해 나아가지 않는 사람이 된다. 모든 과정이 소중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경험하며 우린 마침내 성장하게 된다. 모든 게 과정이라 생각할 때 얻을 수 있는 유익은 우열, 상하와 같은 위계로부터 ..
파국의 전조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독재 정권이 무너지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객관성 상실이다. 이는 주로 독재자와 측근 엘리트들 사이의 비밀스럽고 긴밀한 관계에서 비롯된다. 시간이 갈수록 최측근들은 거짓 충성으로 일관되고 독재자의 하수인인 된다. 이들은 주로 거대한 이야기 하기를 즐기며, 독재자의 생각을 자기 생각처럼 떠벌리기 좋아하며 (빙의), 자신이 측근이라는 사실을 가문의 영광이라도 되는 듯 뿌듯해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실제 고민으로 다가가는 현실적인 문제들은 국민들 개인의 몫으로만 떠넘긴다. 균형을 잡아줘야 할 자리에 있는 자들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그럴듯한 논리를 들이대며, 자신이 이미 얻은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 안테나를 사방팔방에 설치하여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한다. 측근들 서로 간..
부끄러움 이야기의 내용보다 의도가 궁금해질 때가 있다. 늘 수수께끼 같은 말을 즐기는 사람의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나는 항상 의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과연 자기가 내뱉는 말을 다 이해하고 있을까. 어디서 주워들은 말들을 덕지덕지 짜깁기하는 어설픈 앵무새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게다가 뭔가 좀 있어 보이고 싶은 욕망까지 더해져 이런 기묘한 키메라가 탄생한 건 아닐까. 글도 마찬가지다. 철학자도 시인도 아니면서, 혹은 그 분야에 깊은 지식도 없으면서 아포리즘을 툭툭 날리는 작자들의 글에선 그 사람의 가소로움만이 빛날 뿐이다. 무거워 보이려고 하는 자기 가장 가벼운 법이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는 게 용기라는 걸 나는 남들보다 뒤늦게 알아차린 편이다. 배우지 않아 모르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기적들 이 정도면 괜찮은 편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살다가도, 난 여전히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라고 탄식하는 순간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결국 제자리걸음이었던가 싶은 회의가 들고, 그것이 사실일까 봐 두려워진다. 무한루프에 갇힌 듯한 기분. 부끄러움은 오로지 내 몫이다. 이러한 전환이 시간을 따르지 않고 공간을 따르게 되면 문제의 정도가 달라진다. 시간에 따른 점진적인 성장과정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반응이라면, 나라는 존재가 갖는 의미조차 무색해지는 기분이 든다. 나는 나일뿐인데 하루에도 양극을 오가는 평가를 받게 되면 혼란은 물론이며 자책감까지 꺼지지 않는 불이 되어 나를 찾아온다. 이러다 미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수없이 했다. 재미난 건, 동시에 다행스러운 건, 그럴 때마다 혼란의..
풍성한 삶 낮고 오름직한 산들이 좋다. 군데군데 굽이굽이 흐르는 강들도, 드문드문 들어선 시골집들도 좋다. 눈 앞에 펼쳐지는 탁 트인 하늘, 적당한 구름, 적당한 바람, 적당한 온도까지 모두 나를 반기는 것 같다. 단풍을 밟고 인적이 드문 길을 걸어도 마냥 좋은 날이다. 동료들과 함께라서 더 좋다. 삶의 여백이 빛나는 날, 공감각적인 순간들이 아름다운 날이다. 풍성한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잘 닦인 길이 아닌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을 더 걷고 싶다. 땀이 나도 괜찮다. 힘들어도 감당하겠다. 그것이 풍성한 삶이라면, 그것이 앞이나 위만이 아니라 옆을 바라볼 수 있는 삶이라면, 그것이 내가 아닌 남을 향하는 삶이라면. 다행히 나에겐 그 길이 예기치 ..
파이널 억셉 투고 후 출판되기까지 일 년 정도 걸린다고 소문이 자자한 Nature Communications로부터 오늘 새벽 파이널 억셉 레터를 받았다. 한국 오기 두 달 전, 그러니까 지난 4월 말에 투고한 논문이 리뷰어와 에디터의 심사, 그리고 그에 따른 수정을 거듭하며 이제야 최종 승인이 된 것이다. 지금이 10월 말이니 이 논문의 경우는 6개월 밖에 걸리지 않은 셈이다. 덕분에 올해 안에 출판된 논문을 내 두 눈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첫 저자 논문이 출판된 게 2015년이니 벌써 7년이 지났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하고 참담한 사연들이 많았다. 누군가는 변명으로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렇게 여겨도 이제 난 아무 상관이 없지만, 나는 과학자로서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추위의 기억 최저 기온 섭씨 2도. 바람이 매섭다. 긴팔 옷을 입고 밖을 나섰다가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집으로 들어와 옷장을 열고 조금 두꺼운 외투를 꺼내 입는다. 오랜만에 온몸으로 느껴보는 추위다. 피부로 기억하는 추위가 있다. 두 시공간이 떠오른다. 하나는 강원도 철원과 경기도 연천을 오가며 GOP 철책근무를 서던 5사단 열쇠부대에서의 군생활이다. 영하 20도 이하의 기온이 연일 지속되던 나날들이 기억난다. 지긋지긋한 추위에 불평을 해대며 메마르고 얼어붙은 땅바닥을 발로 걷어차던 나날들. 군인이랍시고 웃통 벗고 구보를 한 뒤 허옇게 얼어버린 눈썹을 훈장처럼 달고 돌아와 목구멍 깊숙이 날카로운 바람을 들이마시며 숨을 고르던 나날들. 야산에 뜨거운 오줌을 싸고 얼마나 빨리 어는지 신기해 하며 지켜보던 나..
한 우물 파기 한 우물 파기의 치명적인 약점은 보험을 가입하는 이유와 같다. 요컨대 불확실성이다. 아무리 열심히, 집중해서, 한눈팔지 않고 한 우물만 판다고 해서 물을 항상 길어낸다는 보장이 안 될뿐더러, 그러느라 투자했던 오랜 시간이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사라져 버릴 가능성을 끝내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릴 적부터 숭고한 장인 정신과 같은 맥락으로 배웠던 한 우물을 판다는 행위는 그저 낭만적인 표현에 불과했던 것일까? 결과가 아닌 과정에 주목하면 한 우물 파는 행위는 다르게 읽힌다. ‘한’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덩달아 달리 해석된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안 될 게 뻔한 일을 계속할 사람은 없다. 게다가 오랜 시간 공들여야 하는 경우에는 아무도 그 일을 시작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
미련 기다림의 나날들이다.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인 지 비록 오래지만 기다리는 시간은 여전히 낯설다. 버스를 잘못 내린 것일까. 혹시 잘못된 버스를 탔던 건 아닐까. 2015년 겨울은 차가웠다. 클리블랜드를 떠나 인디애나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내 인생 가장 낮은 점을 지날 때였다. 그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나는 무엇보다 먼저 추위를 느낀다. 마침 뚝 떨어진 기온 때문일까. 하루가 다르게 짧아져가는 해 때문일까.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한적한 길을 걸었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주위도 둘러보며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게 좋아 보였다. 그런데 문득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마음이 많다. 바람 같은 마음을 가진 바위 같은 사람이면 좋겠다.
성품의 맥락 훌륭한 성품은 어디서나 유효할까. 성품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걸까. 멍청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훌륭한 성품에도 맥락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맥락은 크게 보면 하나의 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성품이 훌륭하다는 사람은 우물과도 같은 어떤 특정한 시공간에서만 유효하다는 게 나의 관찰 결과이기도 하다. 즉, 그 우물을 나오게 되면 아무리 훌륭한 성품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성품이 훌륭하다고 칭찬이 자자한 사람들을 살펴 보면 열의 일곱은 기득권에 속해 있었다. 물론 내가 충분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만난 모집단의 사람들의 평균이 전체집단의 평균과 비슷하다고 가정한다면, 결론은 어렵지 않게 도출..
나그네 인생, 그 초월적인 매사에 애착을 가지지 못하는 자의 눈은 흔들리는 법이다. 그렇다면 삶의 애착은 누구의 몫일까. ‘나그네 인생’을 사는 사람과 정착민의 삶을 사는 사람 중 누가 더 불안에 자주 노출될까. 인생이란 정착을 향하고 그것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과 인생은 떠남과 정착의 무한반복으로 이뤄진다고 믿는 사람 중 누가 더 불안에 많이 잠식될까. ‘나그네 인생’의 방점은 허무주의에 천착한 인생이 아닌 매 순간 작은 환대에도 감사하는 삶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곧 더 좋은 곳으로 옮겨 갈 수 있을 것처럼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의 현재 삶에는 감사가 깃들기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더 좋은 곳으로 가길 바라는 마음을 갖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허름한 임대 아파트에 살더라도 삶에 애착을 ..
걷기 걷기가 산책인 사람도 있지만, 궁핍과 가난의 행동양식인 사람도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후자보다 전자가 많아졌다. 못 먹어서 죽는 사람보다 너무 많이 먹어서 죽는 사람이 많아졌다. 너무 많이 걸어서 죽는 사람보다 너무 걷지 않아서 죽는 사람이 많아졌다. 현대인들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걷는다. 하루에 만 보를 채우기 위해 사생결단을 한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변화다. 이른바 걷기의 수직 신분상승. 당신에게 걷기란 무슨 의미인가. 대학생이 되어 부모님을 떠나기까지 집엔 차가 없었다. 가난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모든 이동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시내버스, 시외버스, 고속버스, 지하철, 그리고 비둘기호, 통일호, 무궁화호 기차. 토큰과 회수권은 나의 오래된 향수 중 하나다. 노선이 잘 연결된 경우..
공감의 통로가 되는 인간의 모순 티시 해리슨은 ‘오늘이라는 예배’ 6장에서 스스로를 ‘남편에게 고함을 지르는 평화주의자’라고 소개한다. 이 문장을 읽고 나는 묘한 위로를 느꼈다. 그건 아마도 나 역시 스스로를 ‘아내에게 큰소리치면서도 말과 글만 앞서가고 번지르르한 몽상가’에 불과하다고 여길 때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나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순 덩어리의 인간이다. 내가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 이유도 가만히 따지고 보면,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본성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그의 글 속에서 은밀한 공감과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래야만 한다는 당위성의 관점은 하나의 방향성만을 가진다. 거기엔 다양성도 풍성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존재하는 건 편향적인 획일성이다. 그 ..
의식과 통제를 넘어 사람의 진짜 매력은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비롯된다는 게 내 지론이다. 나는 이를 그 사람의 여백이라 부른다. 무대 위가 아닌 무대 아래에서의 모습. 준비된 말이나 자세, 눈빛, 옷차림 등 의식을 거친 부분들이 미처 메우지 못한 빈 공간. 통제되지 못한 작은 움직임들. 나는 여백이 매력적인 사람이 좋다. 습관처럼 남자들이 여자들을 놀리거나 깜짝 놀라게 하는 등 짓궂은 장난을 치는 이유도 어쩌면 그 장난이 야기할 통제되지 않은 여자의 반응을 보고 싶어서가 아닐까. 그 반응으로부터 남자는 여자의 숨은 매력에 더 빠져드는 게 아닐까. 통제선 안쪽으로 자꾸만 침투하려는 움직임이 성공을 거두어야 비로소 여자의 마음을 살 수 있다고 은연중 믿어서가 아닐까. 반면, 이러한 여백까지도 통제..
루틴을 사랑하기 어딘가로 떠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욕망에서 기인한다. 하나는 목적지에 가고 싶은 욕망, 또 하나는 출발지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전자와 후자는 함께 하기도 하지만, 상호배타적일 때도 있다. ‘지금, 여기’도 좋지만, 더욱 풍성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지금, 여기’가 싫다는 이유만으로 목적지가 어디인지 별 상관없이 떠나는 여행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장이든 도피든 상관없다. 두 가지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지금, 여기’에서의 결핍이 전제된 행동이다. 현재 주어진 환경에 모든 게 갖춰져 있다면 굳이 다른 곳을 찾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완벽한 곳은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에게 여행은 언제나 요구되는 인생의 과정 중 하나다. 한 곳에 머..
변화 시원하다기보다는 쌀쌀하다고 해야 할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온도계는 벌써부터 엘에이 근교에서 가장 추운 날에 기록되던 최저기온을 가리킨다. 어젯밤 마실에서 나는 재킷을 꺼내 입었다. 차가운 대기를 가르며 아내와 걷는 기분이 좋았다. 여름 내내 무성하게 자란 풀이 가득했던 생활관 앞 공터는 며칠 전 제초작업으로 인해 마치 수확이 끝난 논처럼 황량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덕분에 싱그러운 초록색이 사라지고 왠지 회한과 우수가 깃들 것만 같은 노란색과 갈색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공간이 주는 이 감정의 변화,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의 변화. 시인이 되고 싶은 감성이 어디선가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기분. 나는 이 변화가 좋다. 두 팔 벌려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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