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애 열등감은 자기 연민으로, 오만함은 자기 자랑으로 귀착되기 마련이다. 겉모습은 정반대인 것 같지만 둘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모두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에 천착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애, 나르시시즘, 혹은 교만이라 불린다. 교만은 약자에게 가서는 열등감과 자기 연민으로, 강자에게 가서는 오만함과 자기 자랑으로 발현한다. 이를 기독교에서는 죄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모든 인간에게 있는 그 무엇. 자기애. 자기 자랑으로 초지일관하는 사람도 꼴불견이지만, 자기 연민으로 가득 찬 사람 역시 징그럽긴 마찬가지다. 그런 사람을 대할 때마다 곤혹스럽다. 자기 자랑하는 사람은 보통 자기가 자랑을 많이 한다는 사실을 대충이라도 안다. 그래서 거짓 겸손으로 작전을 수정하곤 하지만 겸연쩍어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
소중한 순간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잠든 아이의 평온한 모습을 바라볼 때의 그 기분. 행복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상황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이런 행복감은 잠든 아이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아내가 잠든 모습을 옆에서 바라볼 때도 똑같이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는 깨달았다. 비단 아이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나를 믿는 사람이 잠든 모습은 나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어쩌면 믿음과 신뢰와 사랑은 서로의 잠든 모습으로 확인되고 유지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언어가 아닌 존재가 말을 거는 순간들. 바쁘고 힘든 일상에서 말없이 힘이 되어주고,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해 주며, 소망을 가지고 다시 도전할 수 있게 해주는 소..
힘, 그리고 인간다움 채무자는 자신의 판단을 쉽게 표현하지 못한다. 채권자의 눈치를 보게 된다. 돈의 유용성은 비단 생활의 편리함에서만이 아닌 판단과 발언의 독립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돈이 있으면 눈치를 덜 보게 된다. 자신감이 생긴다. 이성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돈의 힘이다. 돈은 곧 힘이다. 위의 단락에서 돈 대신 힘을 대입해도 의미는 똑같다. 어쩌면 더 핵심을 찌르는 말이 될 수도 있다. 힘은 돈으로만 주어지지 않는다. 지위, 나이, 학력 등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인간관계에서 힘으로 작동한다. 이런 면에서 힘이 약한 자들은 상대적으로 힘이 강한 자들 앞에서 주눅이 들게 되고, 그 결과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게 된다. 죄도 짓지 않았는데 죄인이 된다. 갑과 을의 힘의 논리는 인간관계..
인간의 활동 성향 우리는 이성의 도움으로 어떤 일의 필요성을 알게 되고 그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생각들은 대부분 생각으로 그치고 만다. 좀처럼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 반면, 어떤 지식을 통하지 않고도 정서적인 부분에서 어떤 변화를 경험하게 되면 우린 종종 이성으로 진지하게 고려하지도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겨버린다. 이성적인 부분과 정서적인 부분은 자주 반대되는 입장에서 목소리를 내고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 결과 우리는 뜻하지 않게 일관성에 균열을 내게 되고 스스로 가졌던 나름의 원칙주의에서도 점점 벗어나게 된다. 어쩌면 이성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순간은 이때일 것이다. 자신이 나름 지켜왔던 원칙을 스스로 깨고 난 이후 그것을 합리화하는 과정. 비합리적인 인간이 스스로..
믿음과 살아냄 자신이 믿는 것을 타자도 믿길 원할 때 우린 어떤 방식으로 타자에게 다가가야 할까? 자신이 믿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믿으라고 강요하는 방식? 아니면, 자신은 어떤 것을 진리라고 믿는데 이유는 이러이러하고 그 믿음대로 살아보니 이러이러한 점이 유익해서 너에게도 권하고 싶어, 라는 방식? 어느 것이 더 적절한 방식일까? 자신의 믿음에 객관성과 절대성을 부여하여 마치 그걸 안 믿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방식은 결국 타자를 이분법적으로 배제시키는 효과를 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자신처럼 믿는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인 자가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진리를 모르는 (혹은 배척한) 자가 되어 둘 사이에 우열의 관계가 생길 수밖에 없게 된다. 믿는 자들은 자연스레 믿지 않는..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가 진리라고 의심 없이 믿는 사람은 자기가 지성인임을 의심 없이 믿는다. 그들 중엔 자기가 지성인 중의 지성인이라고 믿는 자들도 많다. 그러나 바로 그런 사람이야말로 반지성적인 사람이다. 지성인인지 반지성인인지는 무언가를 알고 모르고에 있다기보다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얼마나 확신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있다. 이는 모든 걸 다 아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누구든 틀릴 수 있다. 백 퍼센트 확신이란 존재할 수 없다. 적어도 이런 전제에 동의하는 상식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반지성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지성인 중의 지성인이고 싶은가. 그전에 먼저 적어도 반지성인이 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이 시대엔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면 족하니까.
사랑 누군가를 미워하는 행위를 벼린 칼을 찌르는 의식적인 행위라고 한다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행위는 벼리지 않은 칼을 찌르는 무의식적인 행위와 같다. 우리 몸은 크고 작은 많은 가시로 뒤덮여 있다. 철이 들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누군가에게 다가가도 자기 몸에 난 가시들을 다 제거할 수 없다. 또 아무리 그 가시들을 인지하고 감추려고 노력해도 완전할 수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린 상대를 찌르게 되어 있다. 우린 사랑받길 원한다. 그러면서 아무 데도 찔리지 않길 원한다. 우리는 사랑을 주길 원한다. 그러면서 상대에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않길 원한다. 사랑은 자신의 가시를 인지한다. 사랑은 상대의 가시를 품는다. 사랑은 진공 속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사랑은 서로의 가시로 인해..
산책 길을 걸었다. 쉬지 않고 두 시간 반을 걸었다. 늘 차로 지나다니던 길 사이에 산책로가 나 있었다. 이 근처에 2년 넘게 살면서 한 번도 못 봤던 길이었다. 아차 싶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아이에게 아침밥을 먹이고 학교에 데려다준 뒤 가볍게 차려입고 길을 나섰다. 구글 맵으로 거리를 측정해보니 7마일 남짓이었다. 산책로는 다른 산책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두 시간 정도 걷다 보니 왼쪽 발목부터 엉덩이까지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걷지 않았으면 이럴까 싶었다. 매일 걸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건강은 효율이기보다는 무식한 실천이라는 생각을 한다.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인다는 철칙 이외의 영리한 자들이 고안해낸 간사한 샛길 같은 방법들은 일체 배제하기로 한다. 배가 고팠다. 점심시간이 훌쩍 ..
침잠 흐르는 시간은 앞이 아닌 위를 향한다는 생각. 그래서 흘러간 시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니라, 아래로 쌓일 뿐 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 과거에 사로잡힌 채 현재를 과거의 연장으로 살아내는 방식도 건강하지 않지만, 현재에 집중한다는 명목으로 마치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 방식 역시 건강하지 않다. 전자는 현재 없이 과거를 사는 사람이고, 후자는 과거 없이 현재를 사는 사람이다. 둘은 모두 시간의 본질적인 속성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시간은 연속적이어서 지금 이 시간에도 현재는 과거가 되고 있으며 과거는 현재를 존재케 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기 때문이다. 우린 시간 밖에서 살 수 없다. 하지만 그 시간을 함부로 이분법으로 나누고 어느 한쪽만 택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살아서..
거리 가깝다고 해서 항상 더 잘 아는 건 아니다. 때론 거리가 있을 때 더 깊게 볼 수 있다.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 그 적당한 거리를 가늠하고 지킬 수 있다는 게 어쩌면 바로 지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족 사이에서도 이는 유효하다.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로 확장해서도 적용 가능할 것이다. 가까이 다가서려는 마음을 사랑이라는 단어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소유욕은 이기적이며 상대방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려 하는 악한 탐욕이다. 가까이 다가서는 모습은 언제나 다정하고 사려 깊은 모습이어야 한다. 결코 이용하고 취하려는 모습이어선 안 된다. 혼자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적인 공간이 가지는 거리랄까, 혼자서 쉼을 얻을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가지는 거리랄까. 사..
작지만 끊임없는 저항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건 매혹적인 일이다. 나는 늘 그 시간을 동경한다. 일에 쫓기거나 어쩔 수 없이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마음을 더 잘 이해할 것이다. 우리가 때론 적막한 광야를 일부러 찾는 이유도, 함께 잘 지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잠수를 타는 이유도 어쩌면 인간에겐 혼자만의 시간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광야라고 해서 모두 같은 건 아니다. 자발적으로 찾은 광야는 어딘가 멋스러움이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내던져진 광야는 삶의 가장 밑바닥과 맞물린다. 고독과 외로움도 자발적인 선택인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법이다. 관광객과 거주민의 차이랄까. 자기 필요에 따라 광야를 선택한 사람이 피할 곳 없어 ..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23563&fbclid=IwAR2R7yfJGKc2xkc_uk9DXYo02av1em6bIg45qvV8VYt8sXaXZ3ZMk4zSaXg 생물학 실험실에서 만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 NEWS M [뉴스M=마이클 오 기자] 도스토옙스키가 생물학자를 만난다면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인간 실존의 상황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며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 www.newsm.com
몸의 기억 머리는 몸보다 빨리 기억한다. 하지만 머리는 몸보다 빨리 망각하기도 한다. 속도는 느려도 몸은 한번 기억한 것은 오래 간직한다. 머리는 망각해도 몸은 기억한다. 몸은 행동한다. 길들이기는 어렵지만 한번 길들이면 효과가 오래간다. 몸은 좀처럼 망각하지 않는다. 몸은 성실하고 충성스럽다. 머리가 망각한 일을 몸이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 때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그런 순간이 닥치면 머리는 몸의 행동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다.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고 신기해하기도 하고, 말을 듣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몸은 마음대로 행동한 게 아니다. 몸은 머리와 달리 생각하지 않는다. 망각하지 않고, 기억한 대로, 길들여진대로 행동할 뿐이다. 머리는 뒤늦게 몸의 반복된 행동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망각의 ..
작은 것의 무게 작은 것이 큰 것이 될 때가 있다. 함께 했던 소중한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일상의 사소한 일도 그 사람의 빈자리로 인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전환되어 우리를 압도할 때다. 이런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작은 것이 가진 무게를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사는 일상이 알고 보면 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과정과 같은 방향에 있다. 감사가 회복되는 과정과도 같다. 발에 걸리적거리는 물건처럼 없어도 될 것 같은 일상의 단편들도 사랑하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라면 비로소 어떤 의미로 채색되는 것이다. 그 의미를 감지하지 못한 채 여전히 타성에 젖어 무뎌진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이제 깨어날 시간이다. 알아챌 시간이다. 내 일상을 다시 돌아본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
앎의 공적 지향성 무언가를 알게 되면 보이는 것들이 많아진다. 보이는 것들이 많아지면 복잡해진다. 정리가 필요해진다. 기존에 알던 것과 새로 알게 된 것들 사이의 충돌을 조정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뒤따른다. 정반합의 변증법적인 과정을 통해 지경이 넓어지게 되는 것이다. 안다는 건 지경을 넓히는 발전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늘 긍정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한 가지 이유는 변증법적인 과정 중엔 정과 반의 현격한 차이로 인해 합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생기기 때문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새로 알게 된 것으로 기존에 알던 것을 덮어써야 하는 경우, 아니 덮어쓸 수밖에 없는 경우에 봉착하게 될 때 우리의 혼란은 극에 달하게 된다...
나를 넘어서기 나는 내 손에 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것들이 지닌 효율성, 유용성,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사람들을 압도시킬 수 있을지를 혼자서 상상하고 있노라면 마치 미친놈이라도 된 것처럼 혼자서 실없이 웃기도 하며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모두 허영이었다. 허영을 생각하면 곧 터질 풍선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고작 허영과 허세를 위해 탕진한 시간과 만남들이 구름처럼 허다하게 내 인생을 수놓고 있다는 사실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는 성공지향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는 항로이기도 하지만, 그 모습은 교묘하게 포장되어 이 시대 성공자의 지혜로 간주되기도 한다. 실제로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지만 현실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는..
그릇 크기와 모양이 다를 뿐 사람들은 저마다 그릇을 가진다. 어느 정도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날 때 이미 결정되며, 또 어느 정도는 본인의 가치관과 그에 따른 노력 및 실천에 따라 수정된다. 모든 변화가 그렇듯 한 사람이 가진 그릇의 변화 역시 스스로의 노력과 함께 그 사람이 처한 시공간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양은 냄비와 뚝배기의 비유는 사람이 가진 그릇을 설명하기에 적합하다. 열을 가하면 빠르게 뜨거워지는 양은 냄비처럼 어떤 성취로 인해 타자의 인정보다 빠르게 스스로를 높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타자의 객관적인 인정을 수차례 받아도 스스로를 좀처럼 높이지 않는 사람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자기 검열이 유별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자보다는 겸손과 신중에 가까운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
산 그리고 중독 오르기 힘든 높은 산 정상에 간신히 올랐을 때 느껴지는 감정은 단순한 성취감으로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온몸에 전율이 돋는 그 순간의 감격은 이성과 감성을 초월하는 힘을 지닌다. 의식을 뚫고 나온 무의식의 발로랄까, 껍질을 깨고 나온 내면 자아의 민낯이랄까. 그동안 살면서 거쳐왔던 모든 인생의 굴곡과 모든 인생의 역경들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와 만들어내는, 억눌리고 배제되고 소외되고 외롭고 힘들었던 모든 순간들이 한꺼번에 보상받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과 몸짓, 그 순수한 참회의 순간, 무아를 경험하고 참된 자아를 만나며, 초월적인 그 무엇인가와도 접촉을 하게 되는 순간. 이런 경험을 해본 사람과 해보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크다는 사실을 인..
선택 무언가를 준비할 때의 설렘과 기대는 언제나 긴장을 동반한다.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미래를 응시하는 마음은 초조하기 마련이다. 관건은 그 초조한 마음에 쫓길 것인지, 아니면 그 마음을 내치거나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즐길 것인지에 있다.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단, 한 걸음만 뒤로 물러나 그 나무 하나만이 아닌 전체 숲을 관망하려는 마음의 여유를 그 순간 기억할 수 있다면 말이다. 긴장과 초조를 설렘과 기대로 받아들일지 불안과 두려움으로 받아들일지, 둘 중 어느 편을 선택할지에 따라 실로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그리고 이 차이는 우리의 장기 기억에까지 영향을 끼치며, 반복될 경우 그 사람의 깊은 내면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 내면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 가느다란 실..
꺼려지는 훌륭한 사람 잘 알지 못해도 왠지 다가서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 이유 없이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것은 논리, 이성적인 판단과는 별 상관없이 주로 직관에 의거하는 우리 인간관계의 단상이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가까워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면 알수록 거리를 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이 역시 주관적인 판단이겠지만, 아무래도 위에 언급한 경우에서 말하는 직관보다는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 직관 (감정, 느낌, 과거의 경험에 주로 의지한다)은 논리와 이성 앞에선 언제나 힘을 잃는다. 토론에서는 백전백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론의 결과와 상관없이 직관은 인간관계에서 늘 승리를 거둔다. 다시 말해, 사람을 산다는 건 논리와 이성만으로 되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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