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마실 순간적인 귀찮음만 넘어서면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저녁을 먹고 신을 신고 가족과 함께 밖을 나왔다. 쌀쌀한 공기. 따뜻한 손을 잡고 있는 사랑하는 아내와 부쩍 커버린 아들. 행복이다. 뜻하지 않게 살게 된 이곳엔 엑스포 공원, 한빛타워, 신세계백화점이 한곳에 모여있다. 모두가 밤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서울처럼 북적대지 않고도 충분히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을 뽐낸다. 엑스포공원에서 이어지는 다리를 이용해 갑천을 건너면 곧바로 한밭수목원이 나온다. 뉴욕 맨하탄의 센트럴파크를 언뜻 연상케 하는 듯한 느낌. 몇 주전엔 집에서 출발해 다리를 건너 수목원 구석구석을 산책하고 다시 집으로 걸어온 적이 있다. 세 시간 정도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도시와 강과 숲. 신을 신고 집만 벗어나면 언제나 누릴..
초고 ver 1.5 지난주 금요일, 출판사 대표님과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첫 만남 후 한 달 만이었다. 보름 전에 보냈던 초고의 일부에 대한 피드백을 전달받기 위해서였다. 대표님은 이메일이나 전화보다는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고, 이번에도 친히 대전까지 내려와 주셨다. 마음에 살짝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감사한 마음이 컸다. 누군가로부터 믿음을 얻는다는 건 이런 기분인가 싶었다. 만약 이번 글이 책으로 출간된다면, 내겐 세 번째 저서가 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저서를 감사하게도 같은 출판사에서 내주셨기 때문에, 이번이 출판사는 두 번째로 경험하는 셈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출판사마다 다른 비전이 있고 다른 스타일을 가진다. 초보 작가이자 무명작가인 나는 그저 배울 뿐이다...
반복과 초월 모든 게 변해버린 것 같다고 느낄 때 불안은 증폭된다. 사라졌다 생각했는데, 그렇게 믿었는데, 불안은 어느새 도적처럼 내 마음에 들어와 둥지를 틀고 있다. 마치 원래 제 자리라도 되는 것처럼 익숙한 모습. 그런데 이런 뜻밖의 익숙함을 마주하는 내 모습도 낯설지 않다. 또 반복인 것인가. 변했다 생각했던 것도 한낱 바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무한한 존재론적 불안, 그리고 유한한 일상적 위로. 그 결과, 가슴속에 점점 커져만 가는,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구멍. 유한한 인간 내면에 있는 무한한 구멍. 이 아이러니. 나그네 삶이라 해도 마음 둘 곳을 찾는 게 인간이다. 그것의 유한함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잠시 쉬어갈 곳을 찾고 거기서 위로를 받고 작은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삶. 초월적인 삶. 나..
잃은 것과 얻은 것 직업을 막론하고 일주일에 책 한 권 읽을 수 있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내가 그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다. 무엇보다 이런 습관은 물리적인 시간이 많다고 해서도, 의지가 강하다고 해서도 쉽게 얻어낼 수 없는 일상의 열매라고 믿기 때문이다. 무대 위가 아닌 무대 아래에서의 열매.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서면서 점점 더 주목하게 된다. 잃은 것도 있다. 시력이다. 다독의 결과 상대적으로 노안이 빨리 찾아온 것 같다. 안경을 두 개 사용한 지 벌써 3년 째다. 노안 용 안경이 없으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작은 글씨에 초점을 맞추기가 어렵다. 스마트폰으로 긴 글을 보는 것도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런 질문이 생긴다. 그렇게 노안을 재촉하면서까지 책을 읽어야만 하냐고. 그럴 ..
주위를 둘러보는 삶 긴 연휴의 마지막 날, 온다던 비는 또 연기되었다. 덕분에 온종일 흐린 날씨가 지속되었지만, 우리에겐 기회였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기엔 구름 한 점 없는 날보단 살짝 흐린 날이 제격이기 때문이다. 우린 일부러 점심식사를 먼 곳에서 하기로 했다. 한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고 식당에 들어가면 딱 좋을 거리를 택했다. 우린 강변을 달리며 자전거 위에서 작은 자유를 마음껏 맛보았다. 혼자 타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가족과 함께 땀을 흘리며 레포츠를 즐길 수 있다는 건 누구나 누릴 수 있지만,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축복인 것 같다. 앞으로도 틈만 나면 타슈를 동원해 대전 이곳저곳을 다녀볼 생각이다. 기초과학연구원을 오른쪽으로 끼고 갑천을 따라가면 카이스트, 충남대가 이어진다. 우린 충남대를..
David Foster 부모님 댁을 찾을 때마다 나는 나의 과거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흔적들을 만난다. 미국 갈 때 부모님 댁으로 넘겼던 짐들 중에는 내가 아끼던 것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러니까 11년 이상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소중한 추억들을 나는 오늘 다시 만날 수 있었다. David Foster 에게 심취했던 건 대학교 1학년 시절이었다. 때는 1996년, 포항 오지에 있던 기숙사에서 나는 현재 내가 속한 그룹 리더이기도 한 구본경 박사를 만나 한 방을 같이 쓰게 되었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닭장이라 놀림 받던 19동 205호. 맥시칸 치킨을 한 마리 시키면 항상 한 마리 반을 받을 수 있었던 유일한 마법의 장소. 놀랍게도 나의 방돌이는 그 당시 갖기 힘든, 특히 기숙사..
양꼬치 해질 무렵 타슈를 타고 우리가 향한 곳은 양꼬치 전문점이었다. 차를 끌고 가자니 가까운 거리인데도 교통량이 많아 30분 이상 소요된다고 네이버 지도가 알려주던 차였다. 그럴 바엔 자전거를 타고 가자고 아내가 제안했고 아들과 나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퇴근 시간이 겹쳐서인지 정말 차가 많았다. 차를 끌고 나오지 않길 잘했다 싶었다. 특히 신호에 걸려 꼼짝도 못하는 벤츠와 비엠더블유를 유유히 앞지르며 나아갈 땐 일종의 우월감도 느낄 수 있었다. 살짝 생각을 달리 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만 하면 의외로 많은 경우 만족과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는 것 같다. 편리함을 선택한 자가 자신이 선택한 럭셔리한 우물 안에 갇혀 불평과 불만을 해대는 시간, 불편함을 사수한 자는 탁 트인 공간을 자유..
일상에서 일상으로 한국 들어온 지 세 달이 지났다. 숨통이 턱 막히던 찜통 같은 나날들이 어느새 저만치 물러가고, 한국엔 가을이 도둑 같이 잦아들었다. 태풍 힌남노가 한반도 동남부에 생채기를 남겼지만, 여기 대전은 장마 기간보다 비가 좀 더 많이 내렸고 바람이 좀 더 강하게 분 정도로 그쳤다. 태풍이 왔던 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역시 충청도구나, 싶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그 어딘가에 애매하게 위치한. 충청도 특유의 그 무엇. 요즘엔 일교차도 커 한낮 최고 기온은 약 30도를 육박하지만, 새벽녘엔 최저 15도 정도로 떨어진다. 해가 기울고 저녁 무렵이 되면,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과 드높은 파란 하늘이 특히 아름답게 느껴진다. 겨울을 예비하는 가을이 온 것이다. 추워지는 길목...
해석과 믿음 “나는 인도를 받고 있다”는 말은 나의 믿음을 반영한다. 반면, “저 사람은 인도를 받고 있다”는 말은 나의 믿음이라기보다는 해석이라고 봐야 한다. 나의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은 믿음일 수 있지만, 타자의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은 믿음이 아닌 해석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다. 한편, “나는 인도를 받았다”는 말이나 “저 사람은 인도를 받았다”는 말 역시 모두 믿음이라기보다는 해석이라고 봐야 한다. 믿음은 그 해석을 사실로 받아들일 때 요구되는 그다음 행위인 것 같다. 현재가 아닌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에 있어서는 그것이 나의 과거든지 타자의 과거든지 상관없이 모두 해석이지만, 틀릴 수도 있는 해석의 틀릴 가능성을 제거해버리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건 믿음의 영역인 것이다. 어쩌면 믿음은 여러 해석..
나에서 타자로 방향 전환 어제는 무명작가인 내게 선뜻 책 출간 제의를 하셨던 출판사 대표님과의 만남이 있었다. 만약 이 책이 출간되면 나의 세 번째 저서가 탄생하게 된다. 서울에서 편도 약 세 시간의 운전을 하시면서 나를 만나러 와주신 은혜에 나는 감사함과 함께 황송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겨우 할 수 있는 건 맛있는 점심을 대접해드리는 것밖엔 없었다. 최근에 유린기에 맛을 들였던 터라 근처 잘 하는 곳에 가서 우린 맛있는 시간을 가졌다. 어제의 짧은 만남이 내겐 글쓰기에서 하나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때론 책에서 배우지 못하는 지혜와 통찰을 우연한 만남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고나 할까. 특히 의사와 환자의 비유는 나의 제한된 글쓰기 스타일에 생명을 불어넣는 역할..
3찰 (관찰, 성찰, 통찰)의 순서 예전보다 조금 깨어 있다고 해서 깬 사람이 된 건 아니다. 예전보다 조금 이타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고 해서 이타적인 사람이 된 건 아니다. 누가 누구보다 더 깨어 있는지 더 이타적인지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의 현재를 자기 자신의 과거와 비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비교 역시 상대적이라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되겠다. 마찬가지다. 한 우물 밖으로 나왔다고 해서 모든 우물 밖으로 나온 건 아니다. 우물은 양파 껍질처럼 겹겹이 존재한다고 보는 게 현실에 잘 부합한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우물 탈출 여정으로 묘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지난한 노력을 통해 하나의 틀을 깨고 나와도 우리가 겨우 얻을 수 있는 건 손바닥만한 자유와 그만큼 더..
이성과 믿음 나는 “Practice makes perfect.”라는 말을 믿는다. 그러나 “Practice is never enough and perfection is never possible.”이라는 말도 믿는다. 그러면 자연스레 의문이 생긴다. “Practice를 하란 말인가 말란 말인가?” 나는 여기서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성실과 지속과 희망이라는 단어 역시 빠뜨릴 수 없다. 나는 불가능성을 향한 가능성에 몸담고 있는 모든 이들을 응원한다. 결과가 아닌 과정에 주목하고 그것의 가치와 그것으로 이루어진 삶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응원한다. 되지 않을 게 뻔해 보이는 일들에 헌신할 수 있는가. 열매를 맺을지 못 맺을지 아무런 확증이 없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의 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보이는 게 중요한 이유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여주는 창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 겉모습과 속모습, 육과 영 등의 구분에서 우리는 조금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이분법적인 눈으로 하나만 중히 여기고 다른 하나를 경히 여기라고 주어진 구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비교/대조하면서 각 속성을 더 잘 파악해서 전체를 알기 위함입니다. 몸과 마음을 통해 나를 알게 되고, 겉모습과 속모습을 통해 타자를 알게 되며, 육과 영을 통해 인간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마음은 몸을 통하지 않고선 알 수가 없습니다. 속모습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속모습은 겉모습에 묻어난 것밖에는 없습니다. 영도 마찬가지..
풍성한 가지들을 향하여 어떤 것 (A라 하자)이 다른 것들 (B라 하자) 보다 아무리 핵심을 더 간파하고 잘 드러낸다고 해서 다른 것들이 모두 무가치하고 불필요한 건 아니다. A는 잔가지가 아닌 줄기나 뿌리를 B보다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을 뿐, B는 A가 미처 다루지 못한 잔가지들을 더 다루고 있는 것이다. 즉 같은 나무를 알려주지만 둘은 설명하는 데에 있어 무게중심이 다를 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겐 B보다는 A를 소개해주는 게 상식적인 수순일 수 있다. 뼈대에 대한 설명 없이 자잘한 인테리어에 대한 이야기는 기본 없이 응용으로 바로 넘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반면, 줄기나 뿌리 위주의 지식을 어느 정도 익힌 사람에게는 다음 수순으로 잔가지들의 풍성함을 둘러볼 수 있도록 ..
숨겨진 악 꼰대의 해악을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지양해야 한다고 말과 글로 표현하는 사람이 알고 보니 바로 그 꼰대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나아가 바로 그 사람이 나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 나는 눈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수치를 느낀다. 나는 과연 깊은 통찰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내 눈에 거슬리는 꼰대를 저격하기 위해 유치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나의 유치함을 덮기 위해 지혜자로 위장한 것일까.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날, 나는 또 상념에 잠긴다. 함부로 지적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통찰이라는 화려한 옷을 둘렀지만, 그건 교묘하게 숨긴 날카로운 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살리는 척하지만 그 열매는 살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자기기만과 위선에 능한 살인자가..
뻔한, 그러나 정확한 어젯밤 직장 동료와 함께 탑건 매버릭을 보며, 저렇게 뻔한 스토리로도 여전히 충분히 멋진 영화를 만들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기발한 아이디어나 자극적인 소재로 사람들의 말초적인 이목을 집중시키는 방법이 아닌, 진부할 정도로 올드하고 고전적인 정공법이 여전히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고 나는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내가 현대 문학보다 고전 문학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유와도, 단편소설보다 장편소설을 선호하는 이유와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이었다. 예측 가능한 뻔한 이야기 전개가 여전히 감동을 주는 이유는 곧 그 서사 안에 깃든 묘사의 힘 때문일 것이다. 서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 간의 갈등과 위기,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고 회복되는 일련의 과정을 진정성을 ..
은밀한 반역 진정한 새로운 시작은 낮아지는 거라 했다. 낮아지는 것이란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자기 객관화, 다른 하나는 상황 직시다. 전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후자는 나를 제외한 타자와 세상에 대해서다. 놀랍게도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두 가지를 갖추지 못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두 가지 모두를 강력하게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 거부는 외면과 자기기만과 거짓과 위선과 분열과 도피로 이어진다. 낮아지기는커녕 한층 높아진 자세로 타자를 은밀하고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 거짓 겸손의 옷을 입는다. 피해자 코스프레와 과장된 자기연민을 계획적으로 사용하며 타자로부터 동정을 얻어내어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게다가 각 사람에게 다른 모습으로 보여야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효율이 커지..
조바심 문득 꿈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루틴의 무게로부터 잠시 해방받는 찰나. 삶에서 잠시 멈추는 시간. 나와 타자와 세상을 조용히 관조할 수 있는, 우리를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이 예기치 못한 순간.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보이던 것들이 허상임을 깨닫게 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소중한 것들을 또 놓쳐버리고 있었다는 상념에 잠기고 나의 미련함을 탓한다. 그래도 이런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맞이할 수 있다는 게 어디냐며 멋쩍게 자위를 해보지만, 이런 반복도 루틴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다르면 나는 조바심이 난다. 현재를 부여잡는 것. 꿈만 같은 나의 소중한 오늘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면. 오늘을 두 번 사는 것처럼 여유가 묻어나는 편안한 웃음과 넉넉한 가슴으로 나의 하루를 오롯이 끌어안..
새로운 시작 과거의 청산 없이 새로운 미래가 불가능할 것 같지만 우리의 실제 삶은 과거의 어두운 흔적과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시작과 항상 맞물리는 법이다. 새하얀 도화지 위에서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충만하더라도 우리가 가진 도화지 위에 이미 그려진 그림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물감으로 그려졌다는 사실을 우린 곧 재확인하게 된다.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 나의 현재의 의미가 그렇게나 잊고 싶고 지우고 싶은 과거의 바탕 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 절망과 허무에 빠질 수 있는 충분한 순간. 그러나 나는 가느다란 실처럼 살아남은 소망 하나를 붙잡는다. 어쩌면 그 순간은 눈이 한층 깊어지는 순간일지 모른다고. 어쩌면 이 순간을 통해 나는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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