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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사라져도 소리 내는 인간의 추한 욕망의 잔재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보보끄’를 읽고

이 단편소설은 1873년 '시민'지에 발표된 작품이자, '농부 마레이'와 같이 '작가 일기'에 수록된 작품이다. 죽은 사람들의 대화를 다루는, 가히 도스토옙스키의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보보끄'는 러시아어로 '콩알'이라는 뜻이다. 의성어로 쓰일 땐 '콩콩거리다' 혹은 '버벅거리다'를 연상하면 된다고 한다. 이 작품 속에서는, 스스로는 부인하지만, 그래서 더욱 도스토옙스키의 분신인 것 같은, 그러나 자존감이 떨어지고 자존심이 강한 것처럼 보이는 화자가 초반부터 자기에게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 이상한 일들 중 하나가 바로 '보보끄'라는, 마치 누군가가 옆에서 속삭이는 듯한 소리를 듣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기분 전환을 해야겠다고 맘먹고 돌아다니다가 하필 먼 친척의 장례식에 끼어들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미사에도 참석하고 죽은 사람들의 얼굴도 찬찬히 둘러본 뒤, 무덤 주변을 걷다가 운구도 거들게 된다. 그는 자존심을 차리느라 추도 모임에는 가지도 않는다. 대신 묘지 비석 위에 앉아 혼자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다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마치 베개로 입을 막고 말하는 듯한 소리 같았다. 그는 귀를 기울여 듣기 시작한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의 대화였다.

죽은 사람들의 대화는 산 사람들의 대화와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여전히 체면, 자존심, 돈, 명예, 위계질서, 생존욕구, 그리고 색욕에 관련된 천박한 대화들이 오갔다. 그들은 죽은 상태인데도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워했다. 그들 중 한 철학자의 말에 의하면, 그들의 대화가 가능한 이유는 이미 육신은 죽었지만 의식 속에 생명의 잔재가 응축해 있어서 그것이 여러 달 계속되기 때문이었다. 썩을 대로 썩은 시체도 6주에 한 번씩 느닷없이 꼭 한마디를 중얼거리기도 하는데, 바로 그 소리가 '보보끄'라고 했다. 아무 뜻도 없는 소리이지만 그 소리는 시체 내부에 생명이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는 증거라고 했다. 묘지 위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화자는 갑자기 재채기를 하게 되는데, 그 이후 그들의 대화는 사라져 버린다. 화자는 생각한다. 죽은 사람들에게도 낯 모르는 인간에게 숨겨야 할, 그리고 모든 인간들로부터 꼭꼭 숨겨야 할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이라고. 또한 화자는 자기를 당혹하게 했던 것은 보보끄가 아니라 장소를 가리지 않는 타락, 마지막 희망의 붕괴, 축 늘어져서 썩어 가는 시체들이 벌이는 음탕한 수작들이 의식의 마지막 순간까지, 즉 대화가 가능할 만큼 의식이 남아 있는 은혜로 주어진 시간에도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마치 그 순간만큼은 신의 배려로 살아온 나날들을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이어야 하지 않냐고 화자는 믿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다짐한다. 다름 등급의 묘지들도 찾아가 보기로. 다시 이 묘지로 돌아와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기로.

죽은 지 한참 지난 시체도 6주에 한 번씩 '보보끄'라는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과연 도스토옙스키는 무슨 의도로 이 단어를 제목으로도 사용했을까? 그저 죽은 사람들 역시 산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반성은커녕 추한 욕망이 응축된 말만을 하더라, 하는 정도로 이 작품을 표현해도 충분한 의미를 지녔을 것 같은데 말이다. 역시 나는 '도스토옙스키'라는 장르의 키워드인 '인간'이라는 단어로부터 보보끄의 의미를 유추해 본다. 죽어도 남아 있을 만큼 강한 죄와 같은 인간의 욕망, 혹은 의식이 사라져도 소리 내는 인간의 추한 욕망의 잔재가 아닐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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