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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힘, 시선에 변화를 가져오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농부 마레이’을 읽고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후기작인 5대 장편 중 네 번째 작품 '미성년'을 완성한 후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만 남기고 있던 1876년 2월 그가 독자적으로 발간했던 '작가 일기'라는 월간지에 실린 회고록 같은 단편소설이다. 같은 단편이지만, 얼마 전 읽었던 백야 외 여섯 작품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초기작, 그러니까 시베리아 유형 전에 쓰인 작품에 해당된다는 점은 이 작품과의 큰 차이점이다. 비록 짧은 분량이지만 죽음의 코 앞에서 구원받은 자의 글은 아무래도 그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품 속 화자의 기억은 29세 시절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기억은 다시 9세 때의 과거로 우리를 데려간다. 말하자면 두 번의 액자식 구성이 사용된 작품이다. 1876년 현재의 화자는 ‘죽음의 집의 기록’을 15년 전에 쓴 작가다. 29세의 화자는 바로 그 ’죽음의 집’ 소속 유형수다. 그리고 9세의 화자는 귀족 집 자제로서 아직 어린 소년이다. 작품 제목에 등장하는 농부 마레이는 이 어린 소년의 집 소유의 농노다. 참고로, 농도제 폐지는 1861년, 그러니까 도스토옙스키가 마흔이었을 때에 실행된다.

현재의 화자는 자신이 29세 유형수 시절의 어느 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부활절 축제 둘째 날이었다. 그 주간은 간수들도 유형수들도 모두 술을 마시며 자유를 누리는 게 암묵적으로 허용되었다. 화자는 한 따따르 인이 여러 명의 농부들에 둘러싸여 일방적인 폭행을 당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 그곳으로부터 줄행랑을 친 직후였다. 한 폴란드 인이 지나가며 저런 강도 같은 자들이 싫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화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용수철처럼 다시 그 현장으로 돌아간다. 폭행당한 그 따따르 인은 시체처럼 누워 있었고 그 위엔 털옷이 덮여 있었다. 현장을 떠난 화자는 쇠창살이 쳐진 창문 맞은편에 있는 자기 자리로 숨어들어 누워서 회상에 잠긴다. 유년기의 소중한 추억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9세 때 혼자 산에서 놀다가 늑대가 온다는 환청을 듣고 공포에 질려 뛰쳐나오던 그를 따뜻하게 안고 달래주었던 농부 마레이를 만났던 그 짧은 순간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그 9세 소년의 기억은 20년의 시간을 초월하여 29세 유형수의 생각과 마음속으로 침투했다. 그리고 따따르 인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던 농부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무식하게 폭행을 가하던 농부들에 대한 모든 적의와 분노가 기적처럼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들 역시 마레이와 똑같은 사람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정신을 지배해 버린 것이었다. 이어서 그들을 혐오했던 폴란드 인조차 불행한 사람으로 보게 되었다. 

동일한 사건이나 사람을 해석하는 시선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내 안에서도 다를 수 있다. 해석은 주관적인 성향을 띠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부 마레이에 대한 기억 전후의 화자의 시선을 비교하면서 나는 조금 다른 생각도 해 보게 된다. 객관적이기만 한 해석은 존재할 수 없겠지만, 상대적으로 덜 주관적인, 그러니까 조금은 더 객관적인 해석은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냐고. 습관대로, 살아온 대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 사건과 사람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시선은 악의가 없다 하더라도 편향적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에게는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일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이 속한 좁은 우물 속 세상 안에서만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다양성과 다름이 배제된 가치관이나 세계관은 언제나 폭력성을 띠는 법이다. 나아가, 이런 수평적인 다름만이 아니라, 동일한 개인 안에서 일어나는, 시간을 축으로 하는 수직적인 다름도 해석의 객관성을 증대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농부 마레이에 대한 기억이 화자의 시선에 전복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처럼 말이다.

내겐 도스토옙스키의 신앙고백으로 읽혔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자의 시선은 이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농부 마레이를 만나며 시선의 전복을 경험한 화자는 곧 예수를 만나 전복적인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을 장착한 그리스도인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적의와 분노의 대상이 긍휼과 연민의 대상으로 바뀌는 놀라운 경험. 거기엔 비록 폭력과 불의를 행하는 자들일지라도 어떤 면에서는 그들도 농부 마레이처럼 어린아이의 기억에 따뜻한 각인을 심어줄 만큼 인간적인 심성을 지닌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들을 비난하고 비방하는 나 역시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그리고 인간의 근본적인 이율배반적인 본성을 깊이 통찰한 도스토옙스키의 시선이 녹아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나는 시선의 변화를 경험했는가? 경험했다면, 그 시선을 간직하고 일상에서 적용하고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인간에 대한 시선이 어떻게 바뀌었는가? 아, 열 페이지도 안 되는 이 짧은 소설이 한 권의 두꺼운 신학책이 하지 못하는 성찰을 하게 만들다니. 

* 도스토옙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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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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