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드는 이유: 구매자 vs. 독자. 갈수록 내로라하는 베스트셀러 책을 구매하기가 망설여진다. 많이 팔리니 많이 읽힐 거라는 생각, 많이 읽힌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 그런 책은 읽어볼 만한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시간이 갈수록 내게서 힘을 잃어간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얼마 전부턴 반동적인 마음까지 생겨났다. 이젠 베스트셀러라고 하면 괜한 색안경을 끼고서 오히려 그 책을 한 발 떨어져 구경하게 된다. 사람들의 평에 영향 받지 않는 나만의 취향이 생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보다는 그동안 베스트셀러 책을 구매하고 읽어보고 실망했던 경험이 누적된 탓일 테다. 스테디셀러 역시 그리 다르지 않다. 베스트셀러보다는 신뢰하는 편이지만, 이 역시 자본주의의 강력한 힘과 그에..
글을 잘 쓰고 싶은 이유? 글을 잘 쓰고 싶은 이유를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볼 필요가 있다. 원초적인 시기와 질투가 이유라면 당신은 아직 진지하게 글쓰기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당신의 그 시기와 질투의 이유를 한 꺼풀 벗겨내면 허세라는 두 글자가 그 어두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시기와 질투가 글쓰기의 동력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힘을 발휘하는 한 어느 정도까진 발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곧 그 열기는 식고 말며, 조금 후에는 오히려 글쓰기의 무용성이나 주장하는 등, 글쓰기를 연습하는 주위 사람들을 조롱하거나 비난하는 행동으로 이어지기 쉽다. 마치 글쓰기를 하는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은 이유를 가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오류를 범하면서 말이다. 시기와 질투는 겸손과 비슷한 면이 있어서 타자를 자기 자..
읽고 쓰기: 풍성한 삶을 위하여. 하릴없이 멍하니 있는 것도 어느 정도 쓸모가 있지만, 본인의 직업 이외의 시간을 항상 멍하니 보내는 건 바람직하진 않다. 그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가 어쩌면 그 사람의 비공식적인 정체성, 그러니까 사회와 타자와 직업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진짜 그 사람의 정체성을 더 잘 대변해주지 않을까 싶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하는지가 솔직한 그 사람을 말해준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루에 많아야 두세 시간 정도 생기는 혼자만의 시간에 누군가에 떠밀려서가 아니라 스스로 무언가를 한다는 건 곧 자신의 자발적 의지이며 자신만의 목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내가 사람을 사귈 때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다. 그 사람의 직..
책 읽는 시간.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고,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 나는 오늘도 기꺼운 마음으로 낯선 세상의 여행자가 되어 길을 나선다. 타인의 눈과 귀를 통해 나는 넓어지고 또 깊어진다. 처음엔 낯설어서 불안했다. 지금도 여전히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내 발걸음은 매번 조금씩 가벼워지고, 진정한 즐거움이란 게 무엇인지도 조금씩 알게 된다. 나에게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안정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혹은 한 우물만 판다는 꽤나 거창한 이유로 게을리했던 여행들이다. 5년 정도 꾸준히 여행을 지속하며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다. 불안은 떨치는 게 아니라 안고 가는 것이라는 사실. 인간은 존재 자체의 이유를 묻고 그 의미를 찾는 유일한 존재자이기에 불안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불안을..
간판과 거품 사이: 감상에 젖어들기 그리고 글쓰기. 글은 내 안에 있지만 아무 때나 끄집어내어 종이에 쏟아놓을 수는 없다. 그러려면 어떤 특정한 환경이 필요하다. 그 환경이 주는 감상에 젖을 필요가 있다. 흔히들 시상이 떠올랐다거나 영감을 얻었다고 표현하는 순간이다. 똑같은 단어들로 구성되더라도 어떠한 감상에 이끌리는지에 따라 글의 결이 달라진다. 명제적 진술로만 이뤄진 딱딱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좀처럼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뭐 그런 쓸데없는 걸 신경 쓰냐고 타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쓰는 작가에겐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나비효과처럼 글의 결을 바꾸어 글의 맛을 확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경험이 많은 작가들은 자기가 선호하는 글쓰기 환경이 있다. 그 환경에서 본인이 만족하는..
작가의 글: 고뇌와 미련의 텍스트. 쓰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것들 앞에서 나는 언제나 작아진다. 나는 언어를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가 되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가슴 벅차오르는 감동에 짓눌려 얼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나는 잠시 후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더듬이가 되어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쓰게 된다. 제한된 언어와 제한된 시공간, 그리고 제한된 나의 상상력과 글쓰기 역량이 언제나 아쉬울 뿐이다. 아, 내가 느낀 것들을 단 10퍼센트만이라도 글로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래서 글은 언제나 미련이 묻어나는 법이다. 글로 담아내지 못한 90퍼센트 이상의 것들이 흐르는 시간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끝내 살아남은 10퍼센트의 텍스트에 ..
글쓰기의 관점: 현미경과 망원경 되기. 1. 현미경: 단순한 것에서 의미심장함을 안목이라 할 수 있다. 볼 줄 아는 것이다. 세밀한 현미경이 되어 쉬이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능력이다. 과학자의 눈도 필요하나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시인의 눈과 철학자의 눈,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과 소망을 품은 눈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극히 개별적인 사건이나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보편적이고 묵직한 무언가를 건드리고 드러내는 힘이다. 2. 망원경: 의미심장한 것에서 단순함을. 좋은 글은 현미경 역할만으론 부족하다. 망원경 역할도 감당해야 한다. 즉, 관조할 줄 아는 능력이다. 멀리 떨어져 볼 줄 알아야 한다. 객관화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묵직한 사건이나 상황에 압도된, 있는 그대..
습작: 글쓰기의 즐거움. 때로는 형편없는 글을 끄적거리는 것이 유려한 글을 읽는 것보다 더 커다란 만족을 준다. 토로, 해소, 정리, 위로로 이어지는 글쓰기의 유익은 경험해본 자만이 아는 빼앗길 수 없는 즐거움이다. 마음이 답답할 땐 큰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하여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와 벌떡대는 맥박 소리가 어느 정도 잔잔해질 즈음을 틈타 조용한 곳에 앉아 글을 쓴다. 물론 형편없는 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글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그 시간을 가장 사랑한다. 공개되지 않은 채 쌓이고, 또 많은 부분은 버려진 글들의 바다에서 나는 조금씩 수영하는 법과 즐길 줄 아는 힘을 기른다. 글쓰기는 무엇보다 내면의 외침이다. 그 외침은 부메랑처럼 나에게로 돌아와 가장 먼저 나에게 효과를 발휘한다..
글의 진정성. 글은 글쓴이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글쓴이를 숨기기도 한다. 드러냄으로써 숨긴다. 또한, 자기 자신의 과거를 솔직히 나누며 결과적으로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글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힘이 되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적절히 포장, 아니 조작하여 써지는 글도 있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진정성이란 단지 거짓의 여집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목적에 부합하도록 자신의 이야기를 부분적으로 삭제, 수정, 축소, 과장하여 글을 쓰게 된다면, 의도치 않게 거짓의 열매와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처음엔 그러한 조작이 미약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어쩌다가 그렇게 새 창조된 자신의 페르소나가 대중에게 어필하기 시작하면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은밀하게 자기기만에 능한..
각성과 잔상. 좋은 글을 읽을 때 얻는 유익은 각성에 그치지 않는다. 잔상의 지속력에 방점이 있다. 각성은 한 순간이지만 그것이 삶을 변화시키는 건 아니다. 각성은 이벤트이지만 잔상은 일상으로 스며든다. 스며들지 않으면 변화의 시작은 일어나지 않는다. 각성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마는 효과에 그칠 때가 많다. 시작만 창대하고 끝이 없을 때가 흔하다는 말이다. 강한 각성이 항상 강한 잔상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돌아보면 정말 별 것 아닌 기억의 조각이 잔상으로 남아 그 순간을 추억하게 하는 경험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해보았지 않나 싶다. 머리가 원하고 머리가 좋아하는 것이 삶과 무관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은 머리가 아닌 몸, 그러니까 습관이 지배한다. 그러므로 삶의 변화는 습관을 ..
자발적 매임: 자유. 평일에는 많으면 짜투리 시간을 포함해서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 읽거나 쓸 수 있다. 물론 남아도는 시간이 아니라 나름 애써서 확보한 시간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그것을 알아채고 소중히 아끼는 자의 몫이다. 다만 너무 강박이 될 정도로 시간에 매이지 않도록 주의한다. 그러나 적당히 매이는 건 나쁘지 않다. 자발적 매임은 자유를 최대한 누리는 자의 아름다운 선택이다. 읽고 쓸 건 많은데 제한된 시간에 모두 다 할 수가 없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그날그날 읽고 싶은 글과 쓰고 싶은 글이 다르다. 조금 집중이 필요한 고전문학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때가 있는가 하면, 잠시 짧은 여행을 다녀오듯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손에 들기도 한다. 종종 상상력과 허구에 기반..

느리게 읽기: 갈증보단 충만함을. 고전문학을 읽는 맛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순간은 풍경 묘사를 읽을 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거나 기묘한 운명의 장난으로 이뤄지는 숨 가쁜 사건 전개가 이야기를 주도하는 방식, 즉 서사 위주의 방식이 현대소설에서 주로 다뤄진다면, 고전문학에서는 자연을 비롯한 풍경이나 상황, 그 가운데 함께 하는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가 빼놓을 수 없는 주축으로 사용된다. 특별하고 자극적인 사건들로 구성된 서사에 의존하기보다는 바쁘고 정신없는 현대인들에겐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서정적인 묘사가 고전문학에선 많이 사용되는 것이다.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이나 그 인물이 속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섬세한 묘사는 소설의 단순한 부수적 요소가 아니다. 때론 먼 훗날 그 책을 기억할 때 머릿속에 ..

살아있는 글: 읽기와 쓰기의 공명. 읽다 보면 쓰고 싶어질 때가 자주 있지만, 쓰다 보면 계속 쓰고만 싶어질 때가 많다. 좀처럼 읽는 모드로 복귀하기가 어렵다. 이런 흐름에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새 나는 계속 무언가를 쓰고 있다. 책은 한쪽에 멀찌감치 치워둔 채로. 위험한 순간이다. 나 같은 경우, 이미 여러 번 겪어봤는데도 이런 순간을 맞이할 때면 여전히 나는 긴장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마치 인간 본성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느낀다.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교만해지는 내 안의 나. 또다시 내면에서 스멀스멀 고개를 쳐드는 자기중심적인 자아. 읽지 않고 쓰기만 하려는 나. 섬뜩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읽지 않고 쓰기만 고집할 경우, 그 쓰기의 우물은 금..

읽고 쓰기: 감지하고 반응하기, 민감하게. 읽다 보면 쓰게 된다. 독서하다 보면 어떤 한 단어나 한 문장에 이끌려 읽던 책을 내려놓고 무언가를 쓰고 싶어질 때가 있다. 소위 말하는 영감이나 시상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가끔은 이런 순간이 잦아서 진도를 내기 힘들 때도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영감 혹은 시상을 놓치며 살고 있을까? 과연 그런 것들은 작가나 시인 혹은 예술가의 전유물일까? 그것들은 빛나지 않는 일상의 언어와 함께 끊임없이 허공에 뿌려진다. 그것들을 하나라도 더 주워 담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하루는 분명 다른 의미를 지닐 것이다. 무뎌진 우리의 더듬이는 빛을 잃었다. 사용하지 않아서다. 나는 그것을 감히 죄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 들 때도 있다. 놓치고 나중에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

긴 글 연습하기. 일반적으로 한 문장보다는 두 문장 쓰기가 어렵다. 문장 간 연결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로, 한 단락보다는 두 단락 쓰기가 어렵다. 단락 간 연결을 신경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러 단락으로 이뤄진 긴 글은? 당연히 더 어렵다. 일반적으로 짧은 글보다 긴 글이 쓰기 어렵다 (물론 긴 글을 자유자재로 쓸 줄 아는 사람들에겐 짧은 글 쓰기가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건 다른 문제다). 문장 간, 단락 간, 나아가 전체 글의 흐름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두 문장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로 멋들어지게 쓸 줄 알면 자신이 글 좀 쓴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 대표적 예가 마치 자신이 지혜자가 된 것처럼 아포리즘으로 툭툭 진리를 선포하듯 써대는 짧은 글들이다. 그..
좋은 글이란? 함부로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중함을 잃지 않고 유머까지 곁들여 사이다 역할을 해내는 글이 대중들에겐 잘 어필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스타일의 글도 진정성이 결여되면 경박하게 느껴진다. 자칫하다간 아이가 떼쓰는 것 같거나, 누가 뭐래도 난 내 길을 가겠다는 독불장군 인상을 주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너무 진중한 글도 좋지 않지만 멋쩍은 형식만 남은 글은 더 좋지 않다. 차라리 멋들어지지 않더라도 꾸밈없이 솔직한 글이 난 더 좋다. 말초적인 자극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글, 알맹이가 쏙 빠진 글이 넘쳐나는 시대다. 사람들은 영악해졌고 포장하는 일에도 능수능란해졌다. 실상은 알맹이가 없지만 마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글을 마치 판에 찍어내듯 제조해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런 글에서는 자기 자신만..
칼과 펜: 무사와 문사. 과거에 썼던 글을 읽을 때면 나는 대부분의 경우 얼굴이 붉어진다. 이것밖에 못 썼나 싶은 글들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유치한 표현인데도 뭔가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포장하는 잔기술이 눈에 밟힐 때마다 난 수치심을 느낀다. 더욱이 그 당시의 나는 그 글에 대해서 나름 자신감을 가졌다는 사실로 인해 나는 두 번 죽는다. 누군가는 이런 현상을 일종의 진보의 증거라며 격려를 보낼 것이다. 나 또한 한편으론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내가 느낀 부끄러움은 단순히 진보로도 해석될 수 있는, 그런 모호한 감정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 글들에서 나의 가식과 오만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무언가를 깨닫는 순간들이 있다. 이런 순간들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고, 찾아올 때면 언제나 예기치 않은..
읽고 쓰기의 서글픈 변질. 초고속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달로 인해 오늘날 읽을 것은 언제나 차고 넘친다. 그러나 그 읽는 것들의 무게를 달아보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나는 의문이 든다. 인간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읽어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아니 인류의 상당한 수가 읽는 행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굳이 인터넷이 존재하지 않았던 세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이십 년 전, 혹은 십 년 전의 독자들이 읽었던 것들의 무게와 2020년 현재 전세계에 흩어진 독자들이 읽는 것들의 무게를 비교할 수만 있다면, 아마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가벼워지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부피를 말하는 게 아니다. 무게를 말하는 것이다. 어려운 책이나 학문적인 글들만 무게가 나간다는 말을 하고 싶은 ..
여행. 새로운 소설책을 고를 때면 난 언제나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이 된다. 약간의 긴장이 깃든 설렘과 조심스런 기대를 가지고서 난 나의 상상력과 감상성의 문을 조용히 열어젖힌다. 입은 다물고, 눈은 귀가 되어 저자가 묘사하는 자연의 소리를 듣고 사람의 내면까지 침투하여 비로소 타자를 공감한다. 타자가 되어보는 것, 어쩌면 소설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여행이지 않을까. 신형철이 추천한 소설을 일 년 남짓 걸려 틈나는대로 계속 읽어오고 있다. 정확한 글쓰기를 지향하는 그는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훌륭한 글을 써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적어도 한 가지는 통한다고 느끼는 까닭은, 그가 추천한 소설이 한 번도 내 시선을 빼앗지 않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보다 먼저, 나보다 많이 이 ..
독서의 맛.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편안한 의자에 앉아 여유있게 책을 읽는 낭만은 한낱 공상에 빠진 배짱이의 바람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과 인간의 한계를 사실적으로 아는 자의 여유다. 주중엔 ‘주말이 되면 하루종일 빈둥대며 책이나 읽어야지’ 하는 일탈적 상상으로 위로를 받다가도 막상 주말에 되어 시간이 나서 책을 손에 들게 되면 자신이 읽을 수 있는 분량의 한계와 시간의 제약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이내 하루종일 읽을 수 없다는 현실을 체감하게 되고, 자신은 아무리 집중을 한다해도 많게는 수백 페이지, 적게는 달랑 몇 페이지만을 읽을 수 있는 유한한 존재일뿐임을 알게 된다. 수백 페이지를 읽은 경우, 앞서 읽은 부분의 내용이 벌써부터 흐릿해진다는 사실까지 경험하게 되면 그야말로 그 하루는 절망적이다. 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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