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에 들고 갈 작품 12편 약 7년에 걸쳐 지금까지 300권이 넘는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중 꼭 소장하고 싶은 12편을 ‘무인도에 들고 갈 작품’이라는 이유로 재미 삼아 골라봤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문학을 읽어나갈 것이기에 이 리스트는 계속 수정될 것입니다. 즉, 이 리스트는 2022년 9월 현재에 작성된 기록임을 밝혀둡니다. 재미 삼아 훑어보시면서 참고도 하시면 좋겠습니다. 1.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 마음 같아선 5대 장편 (‘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 포함)을 모두 들고 가고 싶지만, 물리적인 무게와 부피를 고려하여, 도스토옙스키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만 대표로 고른다. 인간의 본성을 날 것 그대로 맛볼 수 있으며, 철학,..
초고 지난 주말, 나의 세 번째 저서에 해당하는 초고를 완성해서 출판사 대표님에게 보냈다. 책의 컨셉을 직접 전해 듣고 이해했다고 생각한 뒤로 대략 2주 만의 일이다. 갑자기 글이 써지거나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는다. 왔다고 해도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다. 알아챘다고 해서 그 순간을 좀처럼 기회로 만들어 내지도 못한다. 여러 단계를 거쳐야만 하고, 또 여러 상황이 맞아 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구원이 언제나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처럼, 이런 순간도 글을 쓰는 사람에겐 일종의 구원과도 같은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순간이 지난 주말 나에게 찾아왔던 것이다. 일주일에 걸쳐 고심하며 책의 컨셉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프롤로그를 썼다. 그랬더니 책을 어..
문학을 읽는 한 가지 이유 우리가 어떤 글에 끌리는 건 글이 담고 있는 정보 때문만은 아니다. 특히 그 글이 문학에 속한다면 더 그렇다. 우리는 글이 담고 있는 글쓴이의 목소리, 혹은 문체, 혹은 톤에 이끌리고 마음 문을 열게 된다. 그 글이 전달한 건 지식이 아닌 느낌이라고 할 만한 그 무엇이다. 공감이라고 해도 좋고 위로나 자발적 깨달음 (가르쳐진 깨달음이 아님을 유의)으로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글은 결국 사람을 소환한다. 우린 글을 읽으며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이는 글에 글쓴이의 진정성이 담겨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겠다. 해박한 정보들로 가득 찬 글의 유용성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수긍할 것이다. 우린 그런 책을 통해 배움과 교훈을 얻는다. 글쓴이의 의도대로 독자가 반응한 것이다. ..
읽고 쓰기, 살기, 그리고 사랑하기 읽고 쓰는 시간을 줄였을 뿐 없앤 건 아니다. 아니, 난 없앨 수 없다. 이미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탓이다. 나는 읽고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진정 바라는 게 있다면, 읽고 쓰는 행위로 인해 자기기만이 아닌 자기 객관화로 점점 더 나아갔으면 하는 것. 읽기와 쓰기를 통해 진정한 자존감이 아닌 허영 가득한 자존심만 더 세지고, 타자를 향하기보다는 점점 더 자신에게 함몰된다면, 그 읽기와 쓰기는 허세에 다름 아니다. 자신의 허영을 위해 읽고 쓰는 사람이 아닌 자기 객관화를 통해 분별력을 가지고 삼찰 (관찰, 성찰, 통찰)을 할 수 있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런 면에서 보면, 적어도 내가 아는 바로는 읽고 쓰는 건 품위 ..
글 쓰는 몸만들기 지금까지 몇 차례에 걸쳐 읽기와 쓰기, 서사와 묘사, 문장력과 필력, 문체와 개성에 이르기까지 글쓰기에 관련된 여러 사항들을 생각나는 대로 짚어봤다. 이 시리즈의 글은 일과 시간 중 짬이 날 때마다 두서없이 노트에 적어놓은 것들을 이어 붙인 글에 불과하다는 점을 양해 바란다. 퇴고는 일절 없는 글일뿐더러 의식의 흐름대로 마치 누군가가 불러주는 말들을 받아 적듯 써 내려간 글이기 때문에 전혀 진지하게 읽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마치 글쓰기 선생인 것 같은 뉘앙스가 내 글에서 풍길지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미숙하기 때문이고 내가 글쓰기 마스터라고 여겨서가 아니라 내가 겪은 시행착오에서 배워나간 것들로부터 쓴 개인적인 경험을 나누고자 함임을 알려둔다. 나는 글쓰기 선생이 아니다. 되고 싶은..
문체와 개성 시간적으로는 고전과 현대를 넘나들고, 공간적으로는 미국, 서유럽, 동유럽, 일본, 러시아, 그리고 한국 등을 넘나드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소설을 읽다 보니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그중 하나는 작가의 문체랄까 개성이랄까 하는 작가의 고유한 그 무엇과 그것의 중요성이다. 한국에서 노래를 잘하는 사람 수가 급격하게 늘어난 이유를 노래방의 보급과 한국 특유의 ‘붐’ 문화 등으로 들 수 있겠지만, “노래를 잘한다는 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하나의 답만이 존재하진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가창력, 즉 얼마나 높은음과 낮은음을 자연스럽게 내며 가사의 내용과 그것이 담고 있는 느낌을 호소력 있게 전달할 줄 아는지를 가수로서의 최고의 자질로 들 것이다. 그렇지만 또 누군가는 ..
문학과 비문학 문학과 비문학을 병행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문학 영역에서 내가 주로 소화해 나가는 건 소설이고 가끔 에세이를 읽는다. 비문학 영역에서는 신학, 인문학, 철학 서적을 읽는다. 뒤늦게 독서의 여정을 시작하면서 처음엔 두 읽기를 일대일 비율로 균형 있게 읽어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읽어나가는 속도 차이다. 어지간한 소설은 그것이 가진 서사에 의해, 혹은 작가의 문체에 매료되어 완독 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비문학 서적들은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든다. 하루에 한 페이지조차 읽어내지 못할 때도 부지기수다. 문학과 비문학 읽기에 동일한 시간을 배분한다 하더라도 완독 하는 정도는 물리적으..
문장력과 필력 글 잘 쓰는 사람 칭찬할 때 쓰이는 표현 중에 ‘문장력이 좋다’ 혹은 ‘필력이 좋다’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혼용해서 사용한다. 문장력과 필력을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둘은 엄연히 다르다. 정의부터 알아보자. 필력은 말 그대로 ‘글을 쓰는 능력’이다. 그래서 필력이 좋다는 말은 글을 쓰는 능력이 좋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문장력은 ‘문장을 쓰는 능력’이다. 그래서 문장력이 좋다는 말은 문장을 쓰는 능력이 좋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문장과 글이 같은 것이냐고. 문장과 글은 당연히 다르다. 문장은 글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글이라 함은 문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런 문장이나 써대고 모아둔다고 해서 그것이 글이 된다고..
서사와 묘사 서사가 강한 소설이 있는가 하면, 묘사가 강한 소설이 있다. 한국 현대 작가 중엔 정유정이 전자에 해당하고, 한강이 후자에 해당한다. 두 작가의 작품을 비교하는 건 흥미롭다. 개인의 취향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겐 후자의 작품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묘사의 미학은 어떤 소설이 고전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꼭 필요한 속성이라는 생각도 한다. 정유정 작가의 작품은 ‘진이, 지니’를 빼고는 출간 직후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오를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정유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표현은 ‘압도적인 서사’ 혹은 ‘휘몰아치는 이야기 전개’이다. 그만큼 한 번 빠져들기 시작하면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고 끝장을 보고 만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그녀의 데뷔작을 제외한 네 작품, ‘7년의 밤’,..
읽기와 쓰기 어쩌면 읽기가 먼저냐 쓰기가 먼저냐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와 같을지도 모른다. 문자의 기원을 역사적으로 따지는 물음이 아니다. 이건 읽기와 쓰기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다.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것을 제거해보는 것이다. 읽지 않을 때와 읽을 때를 비교해볼 때 나의 쓰기가 어떻게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점검해보면 읽기가 쓰기에 미치는 영향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읽기는 쓰기의 근간이 된다. 읽기가 배제되면 쓰기는 지속될 수 없다. 어쩌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무 생각 없이 명령대로 무언가를 써야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면, 글은 어떤 영감이 주어질 때에만 쓸 수 있다. 이때의 영감이란 어떤 단상이나 일순간의 느낌을 모두 포함하는 넓은..
아름다운 문장 vs. 아름다운 글 그렇다. 영화 같은 장면들을 경험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글은 아름다운 문장 없이도 충분히 쓸 수 있다. 살고 보니 영화 같은 삶이었을 수는 있어도, 영화 같은 삶만 쫓다 보면 그 인생은 불만족과 공허로 가득 찬, 그래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삶이 된다. 마찬가지다. 진정성 있는 글을 성실하게 쓰다 보면 아름다운 문장을 쓰게 될 기회가 자연스레 주어지게 되는 것이지, 아름다운 문장을 사냥하러 다닌다고 해서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름다운 문장을 사냥하러 다니는 사람은 일상을 버려두고 영화 같은 삶을 쫓는, 즉 무지개를 쫓는 사람과 같다. 그리고 글쓰기 연습에 그런 사냥은 존재하지 않는다. 샛길을 찾는 약삭빠른 사람..
아름다운 문장, 그리고 글쓰기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름다운 문장을 쓰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욕망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글을 쓰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글을 잘 쓰지 못한다고 부끄러운 듯 고백하는 사람들의 이유를 가만히 들어보면 의외로 많은 경우 “멋들어진 문장을 구사하지 못해서”인 것을 알 수 있다. 문득 나는 궁금해진다. 과연 아름답고 멋진 문장을 구사할 줄 아는 능력이 글쓰기 능력과 동일한 의미를 가질까? 글쓰기 능력을 과연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하는 능력으로 환원시킬 수 있을까? 좋은 글은 아름다운 문장이 없으면 쓸 수 없는 걸까? 단도직입적으로 내 대답을 하자면, “NO!”. 아름다운 문장을 쓰고 싶은 욕망은 글을 잘 쓰고 싶게 만드는 동력이 될 수는 있으나..
가볍고 강한 글 빼기, 압축하기, 말하지 않기. 좋은 글은 더하는 게 아니라 빼는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부풀리는 게 아니라 간결하게 압축하는 과정을 통과한 글이며, 궁극적으로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법을 구사하는 글이다. 이런 글은 가벼우면서도 강하다. 힘이 잔뜩 들어간 글을 읽고 있으면 읽는 이도 힘이 든다. 글을 쓸 때 힘을 들이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허세다. 허세는 실제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마치 가진 것처럼 속이는 행위다. 어지간해선 잘 드러나지 않지만 글쟁이들에겐 보인다. 그 사람의 허세와, 허세 뒤에 숨은 허영과, 허영 뒤에 숨은 교만이 감지된다. 드러내서 드러나는 글은 좋은 글이 아니다. 드러내지 않고 드러나는 글, 말하지 않고 말..
말하지 않고 보여주기 주로 명제적 진술로 이루어지는 논픽션과는 달리 픽션인 소설을 읽는 이유는 정보 수집이 아니다. 누군가는 재미 삼아, 누군가는 도피처 삼아, 또 누군가는 특정한 이유 없이 소설을 읽는다. 논픽션에 해당되는 글쓰기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원인 관계가 명확해야 하며 근거와 주장에 모순이 없어야 한다. 잘 써진 논픽션은 한 편의 훌륭한 강연을 듣는 효과를 낸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허를 찌르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깔끔하고 확실한 논리 전개와 증명과정은 읽는 이에게 쾌감과 전율을 선사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명제적 진술은 보여주기가 아니라 말하기라고 할 수 있다. 정보를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간결하고 조리 있게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에 반하여 소..
글의 방향 글을 쓰면 쓸수록 점점 더 소설이 나의 최종 목적지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운명이랄까. 아직은 막연한 이끌림이지만, 그 힘은 강한 자력을 지니고 있어 매일같이 나를 끌어당긴다. 이제는 쓰고 있는 습작 소설의 내용을 하루가 멀다 하고 들춰보고 다시 읽어보고 살을 붙여나간다. 재작년에 시작했던 일이니 햇수로 따진다면 벌써 3년째에 접어든 셈이다. 이제 겨우 A4지로 다섯 페이지 적었으니 효율을 말하자면 정말이지 대책이 나오지 않는다. 이런 식이면 십 년을 써도 스무 페이지밖에 못 쓰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다섯 페이지가 그냥 다섯 페이지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한때는 열 페이지가 넘었다가 다시 한 페이지로 줄었고, 이런 식의 셀 수 없는 반복 끝에 현재 다섯 페이지에 와 있다고..
글의 일시성과 영원성: 작가와 독자 이상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썼던 글은 한동안 읽지 않게 된다. 시간을 많이 투자한 글일수록 더 그렇다. 초고와 퇴고 사이에는 얼마나 많이 반복해서 읽는지 모른다. 퇴고를 끝낸 후 완성이 되었다고 생각한 글에는 더 이상 눈이 가지 않는다.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다. 공을 들인 만큼 애착이 강할 것 같은데, 그래서 계속 옆에 두고 읽을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내가 쓴 두 권의 책도 출간된 이후 한 번도 들춰보지 않았다. 누가 보면 기피한다고 여길지도 모를 만큼. 왜일까.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글은 일시성을 가지는 것 같다. 한 편의 글과 함께 보낸 시간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물론 글과 글쓴이 (작가) 관계에 국한된 말이겠지만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작가 작가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을 ‘성실하게’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글을 잘 쓰는 사람 중에 작가가 아닌 사람도 있고, 작가이면서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글을 성실하게 쓰다 보면 쓰지 않는 사람보다는 당연히 잘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작가는 글을 잘 쓴다는 표현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글을 잘 써야 작가라고 불릴 수 있다는 말은 능력 위주 사회의 편향된 가치관의 반영이자 작가에 대한 환상이라 해석할 수 있겠다. 내 맘대로의 정의이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다른 의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내가 내린 정의에 따르면, 한번 작가는 영원한 작가라는 말은 오류다. 방점은 ‘성실’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가라는 타이틀..
3찰 어떤 작품은 급하게 내리는 소나기와 같아서 읽는 이의 마음을 일시에 흠뻑 적시는가 하면, 또 어떤 작품은 가랑비와 같아서 읽는 이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마음을 적신다. 작품을 읽어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후자의 작품을 선호한다. 갈수록 더 그렇다. 헤세의 말처럼 나도 좋은 작품은 천천히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천천히 우러나오는 그 맛을 나는 사랑한다. 급하게 먹어 해치우는 작품이 아닌, 가만히 음미하는 작품. 음미는 풍미를 충분히 즐기며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언젠가부터 천천히 움직이는 것들의 매력에 대해서 조금씩 눈을 떠나가고 있다. 개인적으로 삶의 진리가 많이 담겨있다고 생각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것들 역시 이러한 천천히 움직이..
책, 기억. 가끔은 책 냄새에 압도되는 도서관에 앉아 하루 종일 책만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을 읽다가 집중이 흐트러지면 저 책을 읽고, 그 책도 지겨워지면 또 다른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공간. 책들이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어도 상관은 없겠지만, 웬만하면 내가 앉아있는 자리 주위에 조금은 무질서하게 보일지라도 산처럼 쌓여 있으면 좋겠다.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학교 도서관이 지하였다. – 건물의 정면에서 보면 지하인데, 뒷면에서 보면 지대가 낮아서 지하가 아니라 1층 같았다 – 하지만 건물의 모퉁이에 위치해 있어 오후엔 커다란 창을 통해 햇살이 비스듬히 쏟아졌었다.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 종종 도서관에 들러 그 햇살을 받으며 책을 빌리거나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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