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사람. 알라딘 US 무료배송 시스템이 사라졌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50달러 이상 구매시 (한 때는 90달러 이상인 적도 있었다) 무료배송이었는데, 며칠 전 읽고 싶은 책이 또 생겨 구매하려다가 결제시 총 결제금액에 배송비가 포함되어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것도 12달러 씩이나! 엘에이 근처에 사는 이점은, 한국에서 책을 싣고 들어오는 비행기가 내리는 곳이 바로 엘에이여서 별다른 배송비가 들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월요일에 주문하면 보통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주문했던 책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제 12달러를 더 내야만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일단 난 구매를 포기해버렸다. 좀 기다리면 다시 무료배송을 실시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서. 읽고 싶은 책이 왜 이리 많은지..
책 여행. 오늘도 나는 컴퓨터 바탕 한켠에 알라딘 홈페이지를 띄워놓고 짬이 날 때마다 여러 책들의 정보를 무심코 훑어본다. 무언가 읽고 싶긴 한데, 정작 그럴 만한 여유는 없고, 그 대신 잠시나마 환기를 하는 용도로 나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 이곳을 방문한다. 정보를 훑다가 맘에 드는 책이 나타나면 곧바로 보관함에 저장하곤 하는데, 그럴 때면 아주 잠시나마 마음만이라도 부자가 된 듯한 묘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한때는 백 권을 넘긴 적도 있다. 수백 권을 저장해도 아무 비용이 들지 않는데 나는 마치 책 한 권 한 권을 돈을 주고 구매할 때처럼 마냥 조심스럽다. 현재는 약 50권의 책들이 내 보관함에서 대기 중이다. 그들 중 몇몇은 벌써 장바구니에 담겼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아마 앞으로도..
Document1. 집에서 사용하는 랩탑 화면에는 항상 워드 파일 하나가 열려있다. 빈 바탕이다. 파일의 제목은 Document1. 물론 저장하게 되면 제목은 바뀔 것이다. 언젠가부터 아웃룩이나 크롬, 즉 이메일 확인이나 인터넷 세상이 아닌 Document1으로 나를 기다리는 랩탑.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서 나는 겸손해지는 것만 같고, 그곳에 뭔가를 채울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묘한 흥분과 일종의 책임감을 느낀다. 커서가 깜빡이며 나의 내면을 받아낼 때마다 나는 나만의 작가가 되는 것이다. 무언가를 쓴다는 것. 그 전에 아무것도 없는 빈 바탕을 경건하게 대한다는 것. 정보가 난무하는 인터넷 세상의 얼굴은 보고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밀려오지만, 나는 빈 바탕이 주는 여유와 겸손이 좋다. 이 글도 곧 Doc..
읽기와 쓰기. 일하는 시간인지 쉬는 시간인지 경계가 불분명한 나날들이 벌써 3주 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어색하기만 하다. 불쑥 찾아온 이 어정쩡한 나날들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어김없이 해는 점점 길어지고 기온은 점점 올라간다. 그리고 몸은 야금야금 불고 있는 것 같다. 젠장. 이제 한낮에는 반팔을 입어야 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부디 이 시절이 빨리 끝나서 오늘도 무지 덥네, 미친 날씨네 하며 차가운 커피나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시원한 에어컨 아래에 함께 모여 이런저런 불평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이메일이나 전화, 혹은 화상 전화로 마주하는 인간관계가 나는 여전히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만 같다. 읽기와 쓰기. 내가 잠자는 시간 말고 가장 많이 하는 일이다. 반은 강요된 ..
소설. 사실과 허구가 공존하는 삶. 나는 사실에서 허탈과 좌절을 맛본 후 자주 허구로부터 공감과 위로를 받곤 한다. 허구의 이야기가 나의 삶의 이야기와 공명하는 순간, 나는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마음 속 깊은 곳을 터치당한다. 이때 허구는 허구를 넘어선다. 내 삶의 의미를 되살려주기도 하고, 잊고 있었던 삶에 대한 의지와 사랑을 되살려낸다. 소망과 기대는 허구와 사실을 넘나들며 오늘도 내게 힘을 준다. 신학도 철학도 주지 못하는 힘을 난 문학에서 발견한다. 소설 읽는 맛. 소설을 읽자.
쓴다는 것. 매일 무언가를 쓰고 있거나 쓰기를 계획하고 있거나 아니면 쓰기를 원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본다. 누군가가 당신은 죽을 때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냐고 묻는다면, 적어도 틀린 대답이 아닐 하나의 대답으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무언가를 쓰고 있거나 쓰기를 계획하고 있거나 아니면 쓰기를 원하고 있을 거에요.” 쓴다는 것. 어느덧 내겐 일상이 되어버린 일. 산다는 건 쓰거나 쓰길 계획하거나 쓰길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시간차를 가지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쓰면서도 쓰길 계획할 때도 있고, 쓰길 원하는 마음이 충만한 상태에서도 쓰고 있을 때도 많기 때문이다. 쓴다는 것은 여러가지 유익이 있겠지만 나는 그 중에서 치유와 쉼을 손꼽는다. 타자와 분리되는 사적인 공간으로..
짬과 책. 약 30분 내외의 짬이 날 때면 보통 이 어정쩡한 시간에 대체 뭘 할 수 있겠냐며 하릴없이 스마트폰을 켜거나 잡담을 하거나, 아니면 그냥 멍 때리고 있기 쉽다. 그럴 때 나는 손에 책을 든다. 내가 길들인 후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습관 중 하나다. 나는 어딜 가나 책을 가지고 다닌다. 예전엔 뭔가 들거나 메고 다니는 것을 워낙 싫어했었지만, 손에 책을 들고나서부터는 아주 오래 전 아내가 쓰던 갈색 키플링 가방을 들고 다닌다. 내 가방 안에는 열쇠와 지갑, 두통약과 혈압약, 그리고 펜과 책이 들어있다. 책은 보통 한 권이나 두 권을 들고 다니는데, 짬이 나는 시간에 따라 즉흥적으로 읽고 싶은 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고 싶을 때가 있고, 내가 속한 독서 모임 세 군데에서 늘 읽고 있는..
읽기와 쓰기. 아이와 단 둘이 있다보니 혼자만의 시간이 많이 사라졌다. 물론 외로움도 같이 사라졌다. 허나 그와 동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도 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난 그 무언가를 갈망한다. 아침엔 약 30분 간 헤겔을 읽고, 일과시간에 짬이 나면 약 30분 간 소설을 읽으며, 아이가 자기 전 베드타임스토리 시간엔 영어로 써진 성경 두 장 정도와 아이들 탐정 소설 두 챕터 정도 소리내어 읽고, 아이를 재우고 조용히 빠져나와 늦은 밤엔 약 한 시간 정도 예수의 역사성을 공부한다. 서로 다른 영역의 책을 조금씩 들여다보는 시간이 요즈음 나의 유일한 독서 시간이다. 게다가 세 권의 책 모두 결코 쉬운 내용이 아니라서 진도도 더디다. 30분 간 집중하지 않으면 다섯 페이지도 채 읽지 못할 때도 있다. ..
눈. 책을 읽거나 강연을 듣거나 대화를 나누면서 문득 무언가가 깨달아질 때가 있다. 보통 그럴 때마다 나는 희열을 느끼며 섬광처럼 스쳐지나가버릴 그 순간을 글로 담아두려고 노력한다. 글로 옮기다보면 이미 많은 것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사라졌으며 거기엔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세계관이나 가치관에 따른 해석이 불가피하게 자리잡는다. 역사도 실제 사건의 기록만이 아닌 역사가의 해석이 합쳐진 실체인 것처럼 내가 깨닫거나 알아낸 그 무언가가 인간의 눈에 보여지는 글이나 그림이나 음악으로 표현되어질 땐 해석이라는 과정이 첨가되기 마련이다. 어떤 글이 좋은 이유를 단순히 화려한 수사나 적절한 단어 선택, 혹은 군더더기 없는 정확한 문장 등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 두편의 글은 그렇게 다가올..

2019 읽은 책. 아직 12월이 절반 남아있지만, 한국 방문하기 전 올해 읽은 책 목록을 정리해보았습니다. 문학관련 25편, 신학관련 21편, 인문철학과학관련 14편을 읽었습니다. 총 60편입니다. 권수로 하면 도스토예프스키 장편소설 덕분에 숫자가 좀 더 늘어나겠네요. 일주일에 한 권 정도 읽은 셈입니다. 이 중 감상문으로 남긴 건 46편입니다. 14편은 감상문을 쓰기엔 제 역량이 부족하거나 쓸 만한 이유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쓰지 않았습니다. 자랑이라면 자랑이고, 정리라면 정리겠지요. 이런 포스팅을 아니꼽게 보시는 분들도 있을 테고, 자극과 도전으로 받아들이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해마다 이렇게 결산을 내보는 건 누구에게나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지나온 길을 한 번 뒤돌아 보면서 잠시..
2020 독서 계획. 내년에 다섯 편 이상 읽을 고전문학작가는 니코스 카잔차키스로 정했습니다. 한국 일정이 12월에 생긴 바람에 미처 다 끝내지 못할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더불어 그의 몇몇 단편소설도 내년에 마저 읽을 계획입니다. 또한 제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스타일의 문체로 쓰인 몇 편의 작품도 읽을 계획입니다. 파스칼의 '팡세',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카뮈의 '결혼', 장 그르니에의 '섬' 등입니다. 몇 번씩 시도했으나 번번히 중도 포기했던 작품들이랍니다. 그래서 미련이 많이 남습니다. 내년에는 꼭 읽어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감상문까지 남길 수 있다면 더 좋겠구요. 제가 참여하고 있는 철학 모임에서는 헤겔과 마르크스, 하이데거와 라깡에 대한 입문서 혹은 개론을 읽..
문학적 표현력. "떨리는 가슴으로 나는...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보았다." 여기서 '떨리는 가슴'은 일인칭 용어인 반면, '떨리는 어깨'는 이인칭 용어다. 가슴과 어깨의 차이. 가슴은 앞에 위치하며 내가 볼 수도 있기 때문에 내 의지를 반영한다. 반면, 어깨는 내 눈으로 보기가 어렵다. 다른 사람의 어깨를 보는 편이 더 쉽다. 그것도 앞이 아닌 뒤에서 그 사람 몰래 보는 것이다. '떨리는 가슴'은 주로 화자의 감정 상태를 표현한다. 흐느껴 울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흥분과 기대에 벅차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떨리는 어깨' 역시 감정을 나타내지만, 화자가 아닌 화자의 시선이 닿아있는 상대방의 감정이다. 온몸이 흔들릴 정도가 아니라 어깨가 떨린다는 것은 미세한 움직임을 뜻한다. 화자의 시선에는 ..
추천 부탁. 대략 한 해에 신학자나 인문학자, 그리고 고전문학작가를 한 명씩 택하고 그들의 작품을 적어도 다섯 편 이상 읽어나가면서 그들의 사상과 필체 등을 배우기로 맘먹은 지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다섯 편 넘게 읽은 작가는 헤르만 헤세, C. S. 루이스, 크리스토퍼 라이트, 김근주, 강남순,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읽었으나 감상문으로 미처 남기지 못한 작품도 있고, 추가적으로 더 읽고 싶어 구입은 했으나 아직 책장에 꽂힌 채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작품도 있습니다. 내년에는 톰 라이트의 작품을 읽어보기로 작정해서 이미 리스트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고전문학작가를 누구로 선정할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톨스토이를 제 주위의 몇 분이 공통적으로 추천해 주셨는데, 그만큼 다섯 편 이상 작품을 써..
**다음은 며칠 전 군대 얘기 때문에 잊어버렸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다. 글이 만들어지는 몇 가지 다른 과정에 대한 나 혼자만의 생각이라고 하는 게 더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세 가지 글쓰기. 첫 번째, 받아 적는 글이다. 즉, 주체할 수 없는 속도로 뿜어져 나오는 생각을 주워 담느라 급급한 마음으로 쫓기듯, 받아 적듯 쓰는 글이다. 보통 어떤 장면을 목격하거나 관찰하면서 마음에 담긴 어떤 불특정한 잔상이 내 안에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던 기억의 조각들에 숨을 불어넣을 때 이런 일이 발생하곤 한다. 바닥의 먼지처럼 무질서하게 나뒹굴던 생각의 파편 중 몇몇이 알 수 없는 어떤 과정에 의해 선택되어 조용히 공중으로 떠오르면서 무언가 하나의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그림이 퍼즐처럼 맞춰져 그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읽기. 마흔이 되기 직전 나의 읽기는 위가 아닌 옆을 향하기 시작했다. 다시 독서다운 독서를 시작했으나, 처음에는 방향에 대해 별다른 기준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한 기준이 생겼다. 한 해에 고전문학자 한 명, 신학자 한 명을 힘이 닿는대로 읽어보자는 것이었다. 각각 5권에서 10권 정도 읽어보면 한 두권 읽은 경우보단 조금이나마 저자를 깊게 이해할 수 있고 기억에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신학자의 경우 그 사람의 사상과 그 시대의 신학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흐름을 알 수가 있고, 문학가의 경우는 그 사람의 사상을 포함하여 필체와 문장력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학의 경우, 작년엔 헤르만 헤세, 올해엔 도스토예프스키였다. 한 권 분량이 두 작가가 너무 달라 권 수로는 차이가 나..
감상문. 이번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읽고 다른 때보다 힘들게 감상문을 쓰면서 다시 나에게 물었다. "나는 감상문을 왜 쓰는 걸까?" 지금까지 견지해온 멋쩍은 이유는 "독서의 완성을 위해서"였다. 그냥 한 번 쓱 읽고 지나치는 책은 웬만해선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다. 애써 마음 담아 읽어낸 책을, 나의 소중한 시간을 허투루 날려버리기 싫었다. 아까웠다. 뭔가를 잃는 것 같았다. 또한 나에게 선물로 다가온 책과 그 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모든 책이 다 해당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책들을 읽고 나선 뭐라도 남겨야 할 것 같은 절박함이 어느 순간 생겨나기 시작했었다. 나에겐 마침 힘들 때 찾아온 인생의 선물이 독서였다. 내 인생의 나지막한 곡선과 맞물려 그렇게 절박함은 배가..
근력. 글을 읽고 싶을 때가 있는가 하면, 쓰고 싶을 때가 있다. 이 둘은 서로 상승 효과를 낸다. 읽은 것들은 글을 쓸 때 밑천이 되어주고, 쓴 것들은 글을 읽을 때 보다 넓고 깊은 눈을 열어준다. 많이 읽는 사람이 쓰는 글은 적게 읽는 사람의 글과 다르기 마련이고, 많이 쓰는 사람의 글 읽는 눈은 글을 안 쓰거나 적게 쓰는 사람의 눈과 다른 법이다. 읽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고, 쓰는 사람만이 읽을 수 있는 눈이 있다. 적어도 나에겐 그런 것 같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다. 이 둘은 상승 효과만이 아닌 배제 효과도 낸다. 글을 읽기만 하고 싶을 때가 있는가 하면, 또 쓰기만 하고 싶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읽고 싶을 땐 쓰기 싫고, 쓰고 싶을 땐 읽기 싫을 때가 종종 찾아온다. 난 이런 순간..
읽고 쓰는 이유. “왜 그리 독하게 책을 읽으세요? 일도 하시면서 어떻게 그렇게 책 읽고 글을 쓰실 수 있으세요? 대단하세요.” 페북에 독후감상문을 올리기 시작하고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입니다. 재미난 것은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의 말은 감사와 칭찬과 격려로, 누군가의 말은 부러움이나 시기심으로, 또 누군가의 말은 조소 섞인 비아냥거림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주관적인 제 느낌일 뿐이겠지만, 똑같은 말이 이렇게 다르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결국 관계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합니다. 한 두 번 제 글을 읽고 하시는 말씀들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평소에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에 지속적으로 비쳐진 제 모습을 제 글과 동일시하기 때문일 ..
글쓰기. 어느덧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글쓰기. 여전히 마음 설레고 즐거운 일이지만, 얼마 전부터 사실 난 한계를 느껴오고 있다. 책에 대한 감상문을 쓰고 페북을 통해 공개적으로 나누기 시작한 지도 2년이 넘었다. 그 동안 약 150 권 정도의 책을 읽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은 감상문으로 남겼다. 한 주제에 국한된 책만 읽어온 게 아니라서 그런지 다행히 나의 글쓰기는 책의 다양성의 영향으로 단조로운 패턴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다양성도 2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약 100 편의 글이 되니 서서히 고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고인 물은 죽음이 예정된 물이다. 한편, 비록 희미하지만, 내 글에서 나만의 필체가 생긴 것 같아 한 동안은 조금 뿌듯하게 여기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의 공식이 되어..
책. 이번 한 달은 어쩌다보니 8권의 책을 눕혀 책장의 가장자리로 보낼 수 있었다. 그 중 7권에 대해선 감상문도 남겼다. 나에겐 감상문을 쓰는 작업이 독서의 마지막 단계다. 책을 다 읽고 가슴에 남아있는 울림과 잔상으로 저자의 의도를 진지하게 한 번은 생각해야만 할 것 같고, 나만이 소화한 부분을 감상으로 표현하여 화답하는 게 작가에 대한 예의인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어느덧 감상문 수는 거의 100에 가깝다. 예전에 누군가가 내 글은 서평이 아니라고 넌지시 비판 아닌 비판을 했더랬다. 난 서평을 쓰려고 시도한 적도 없었고, 그런 책소개를 해서 뭣하나 싶기도 했으며, 눈을 조금만 크게 떠서 페북세상만 봐도 서평의 천지이기에, 거기에 하나 더 보탠다는 건 공해에 가깝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지금도 이 생..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