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을 받은 사람이 긍휼을 베푸는 것은 당연하다. 마태복음 18장 후반부에 보면, 무려 만 달란트나 빚진 종이 주인으로부터 긍휼을 입어 그 빚을 탕감 받게 되는 사건이 소개된다. 그런데 그 종은 자신으로부터 고작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그 동료가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돈을 갚으라며 감옥에 쳐넣는다. 다른 동료가 이 사실을 알아 주인에게 알리게 되는데, 결국 그 종은 다시 주인에게 불려가 탕감 받은 것을 취소 당하고 옥졸들에게 넘겨진다. 배은망덕의 전형인 셈이다. 완전 쌤통이다. 한편, 마태복음 5장 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18장과는 달리 여기선 긍휼을 베푸는 행위가 먼저다. 긍휼히 여김 받는..
조금은 꼰대스러운 인생 선배의 얘기나 선생님의 진심 어린 조언, 그리고 철학적이고 학문적인 노하우가 담긴 책이나 강연을 접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한없이 교만해질 때가 있었다. 당연히 겉으론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아무래도 거짓은 한계가 있는 법이고 교만은 풍선 안에 있는 가시 많은 장미와도 같은 것이었다. 모른 척하고 있다는 것을 지혜롭게(?) 과시하면서 모른 척해주는 연극과도 같은, 그 은밀한 우월감에 도취된 나의 가식적인 배려는 그저 유치찬란한 교만함의 전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가진 복음이 한낱 인간의 사유물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지식이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자!" 이 전염성 강한 문장에, 본 뜻과 다르게, 난 심하게 중독되어 있었다..
나는 자유주의적으로 사유하기를 좋아하지만, 여전히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하이브리드다. 비록 주먹구구식이지만, 느지막하게 문학과 철학, 그리고 신학을 조금씩 공부해 나가면서 많은 생각과 묵상을 하게 되었고, 내 안에 뿌리내린 신앙에 의심을 가지고 질문을 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흐름에 따라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 신앙과 삶에 대해, 그리고 복음과 하나님에 대해 조금씩 답을 얻어 나가고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가면서 점점 균형 잡힌 하이브리드로 진화 중인 것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깊숙이 뿌리내린 신앙의 우파적인 것들은 뿌리 뽑아야 할 적폐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좌파적인 생각을 진행할 때 필요한 분별력의 잣대가 되어주기도 한다. 또한, 나름 인생의 쓴 맛을 본 것을 계기로 세상..
거짓말하지 마라. 여전히 공허함을 느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말하지 마라. 행복의 다른 이름은 채워짐이지 공허함이 아니다. 부족하다고, 연약하다고, 습관처럼, 마치 겸양인 것처럼 말하지 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뻥치지 마라. 행복은 여전히 당신 손에 쥐어지지 않은 구름일 뿐이다. 공허함이 아닌 행복함을 말하고 싶다면, 차라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의 문장을 빼라. 그냥 마침표로 당당히 말해라. 행복하다! 고. 소중한 것을 소중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당신의 공허함이 채워졌다면 당신은 행복한 것이고,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다면 아직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정말 소중한 것은 모든 것을 덮는다. 덮음, 그 채워짐, 그것이 행복이다. 예수와 하나님나라, 아직 당신은 만족하지..
다 때가 있는 법이라는 말이 듣기 싫었다. 의지와 노력의 결여를 합리화하는 변명이라 여겼다. 그러나 어느덧 나이 마흔이 되고, 그 어른들의 말을 내 고백으로 하는 나를 본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때가 있는 것 같다. (아.. 결국 나도 꼰대로 수렴? ㅜㅜ) 원하는 것도,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모두 점점 부질없이 느껴진다. 해서 뭐하나 싶다.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이렇게 가깝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뭔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라도 없다면 차라리 나을 것 같다. 이것저것 할 줄 아는 내가 참 미련하게 느껴진다. 여러가지를 적당히 할 줄 안다는 말은 곧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이 썩 맘에 들진 않지만, 딱히 받아칠 말이 없다. 방어능력 상실이다..
"하나님나라는 어떤 곳일 것 같아?" 아, 난 이런 대화가 너무 좋다. 구원받고 못받고를 규정짓고, 각자가 정한 규칙에 근거해서 서로를 정죄하고 차별하고 배척하는 피곤한 교리적이고 종교적인 싸움에서 벗어나, 이런 열린 질문을 하며 서로의 얘기를 경청하고 나누고 자신의 현재의 삶과 연결시켜 사유하는 공동체. 삶과 신앙을 연결시키며 풍성하게 나누는 공동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예수가 그리스도이고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복음을 듣고 알고 믿는다지만, 그것이 개인의 구원과 윤리적인 차원만을 위한 거라고 여긴다면, 분명 그 복음은 (결국 나 중심의 착한 일 정도이기 때문에) 원죄의 아래에 놓인 종교와 같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우리가 죄인이라는 점을 공히 인정한다더라도,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의 태어..
어떤 것이 목적인지 수단인지 알 수 있는 쉬운 방법이 있다. 수단이라 여겼던 것을 그 사람에게 줘 보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수단이었다면 그 사람은 그것에 감사하며 아직 성취하지 못한 목적을 향해 계속 전진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실체가 실제로는 수단을 가장한 목적이었다면 그 사람은 여정을 끝낼 것이다. 원하는 걸 얻었기 때문이다. 소원성취와 문제해결 vs. 성령충만과 하나님나라 교회를 단 몇 번만 다녀본 사람도 눈치가 있다면, 바보가 아니라면 금방 알 수 있다. 둘 중 어떤 것이 인생의 목적인지. 그리고 둘 중 어떤 것을 목적으로 말해야 사람들이 칭찬하고 좋게 바라보는지. 퇴근 길 전철 안에서 김근주 교수님이 쓰신 "성경을 보는 눈"을 읽다가 신명기 17장에 나오는 내용, 왕에게 많아서는 안 되는 세..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되게 해달라고, 나는 자주, 그것도 아주 간절히 기도했었다. 나는 그것이 "성공자의 기도"라고 여겼었다. 남들과는 사뭇 다른 기도 제목에 나는 은근히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당시 내가 믿던 하나님이란 존재 앞에서도 난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 "확실했던 기도"가, 가치관이 많이 바뀌면서 "아무런 근거없는 자기기만"으로 판정나는데, 나에겐 무려 40년 가까이의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하고 지식을 종합해 보기 전에 먼저 내 삶을 조금 떨어져서 관찰해본다. 한 인간에게 있어 40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게 아니다. 과연 기도라는 것이 내 인생에 있어 어떠했는지를 살펴본다. 난 그것을 어떻게 겪어왔으며, 또 그것이 어떻게 ..
우리가 예배할 때나 찬양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가 있다. 하나님은 높으시고 위대하시다는 고백이다. 정권교체가 된지 열흘이 넘었다. 국민들은 새로 선출된 대통령의 탈권위적인 모습에 감동한다. 페북이나 어느 뉴스를 봐도 비슷한 메시지가 넘쳐난다. 전 정부를 포함한 지금까지의 대통령의 권위적인 모습, 높은 자리에 앉아 그 어느 누구도 범접할수 없는 그 위대함이 눈에 보일 정도로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한 놀람과 감사함이 반영된 반응일 것이다. 하나님이 높고 위대하다는 믿음의 고백이 전혀 틀리진 않지만, 하나님이 높고 위대하기만 한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면 정말 곤란하다. 문재인 대통령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자기 몸을 낮추시고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스스로 희생하신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
그동안 난 밥 퍼주는 것과 같은 구제활동을 반대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동조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것들 한다고 뭐가 달라지냐는 조소를 속에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아래엔 예전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한나의 아이를 읽을 때 발췌해 놓은 단락이다. 오늘 문득 노트를 보다가 맞다는 생각이 들었고 부끄러워졌다. 마음이 움직였다. 아. 난 얼마나 더 깨져야 하는가. |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여 주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으니 지역의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이웃을 위해 식사를 준비해 보자고 했다. 그 식사가 성찬은 아니었지만, 성찬식이 우리를 어떤 사람들로 만들었는지 알리는 증언이 될 거라고 말했다.|
- 김근주 교수님의 '구약으로 읽는 부활신앙'을 읽다가 잠시 책을 내려놓고 묵상하다가 떠오른 생각의 단편을 아래에 끄적임. 부활신앙을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연결시키는 해석은 매우 공감이 가고 아주 신선하다고 느껴짐. 마침내 완성될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그 사람이 초월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현실은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나라”의 중간 단계다. 여전히 죄와 악이 범람하는 세상이다. 우리는 그런 현실 가운데서 약속된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존재인 것이다. 소망을 가졌다고 해서 현실의 모든 환란을 초월할 수 있다고 자칫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과 육이 이원론적으로 구분되어 있거나 신앙과 삶이 동떨어져 있을 가능성이..
- 새 하늘과 새 땅의 의미를 되새기며, 톰 라이트를 읽다. - 그의 저서를 두 권밖에 읽지 않은데다 신학적 배경지식이 허접한 관계로 내가 감히 톰 라이트를 평가할 순 없을 것 같다. 최근에 읽은 “이것이 복음이다” (톰 라이트 저, IVP 출판)를 읽고 밑줄 그은 부분 중 일부를 나누고 싶어 아래에다 옮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내가 느낀 톰 라이트의 목소리는 강하다. 하지만 강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깊다. 정통으로 타겟의 정중앙을 깊게 찔러 한방에 격퇴시키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톰 라이트를 통해서도 기독교에 깊게 들어와 꽈리를 틀고 있는 무속적이고 이교도적인 사상과 신앙이 퇴출되기를 기원한다. 1. 창조와 언약을 잊어버린 복음을 제시하는 것, 무고한 희생양의 피로만 진노가 풀리는 성난 신에 관한 복음을 ..
성막의 휘장만 찢어진 게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죽음을 맞이하신 곳은 십자가였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수직적인 상하뿐 아니라 수평적인 좌우가 만나는 (cross) 상징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화목의 다리로써, 죄악으로 갈라졌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도 허무셨다고 난 믿는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제거할 수 없는 상하좌우의 경계가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로써 악은 심판받았고 하나님나라가 임했다.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약속이 성취되었다. 나라와 인종과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열방이 복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길이 열렸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자 핵심이고, 이것이 바울이 전했고 또 우리가 전해야할 '십자가의 도'일 것이다. 난 현재 미국이란 특..
우리들이 믿는 바를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전에는 우리도 우리들이 그 동안 무엇을 믿어왔는지 모르는 법이다. 우리들의 말하기와 글쓰기가 탐색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들에게는 말을 하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이 믿음을 확인하는 방법이 된다. 그 사람의 말과 글은 곧 그 사람이 믿는 바다. 그 믿음이 실천적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어쨌든 그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다. 겸허해질 수 밖에 없었던 인생의 한 점을 지나면서부터 다른 사람의 말과 글 (특히 글)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그 동안 마치 몇 년은 족히 굶은 것처럼 게걸스럽게 책들을 마구 먹어댔다. 나의 내면에 숨겨져 있었으나 그것이 내 것임을 뒤늦게 발견하게 되었을 때 오는 극심한 혼란과 충격에 그 상황의 원인과 답을 찾으려 했던 것은 내가..
사랑하고 용서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먼저 사랑받고 용서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기 위해선 당신이 사랑받고 용서받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당신의 두번째 정체성이지요. 그렇다면 당신의 첫번째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번째 정체성이자 현재 당신의 정체성과도 같습니다. 당신은 돌아온 탕자와도 같습니다. 원래 아들이었으나 반역하여 아버지를 스스로 떠났고 다시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것이지요. 물론 첫번째와 세번째 정체성 간에는 차이도 있습니다. 그것은 떠나기 전의 아들 (첫번째 정체성)이었을 땐 사랑받은 존재였지만, 용서받은 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용서받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돌아온 아들 (세번째 정체성)이었을 땐 사랑과 용서..
엘리야가 고독과 침묵에 들어가 처음 부딪쳐야 했던 것은 자기가 모든 면에서 몹시 피곤하고 고갈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로뎀나무 아래 드러누워 잠들었다. 그런 그를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다루는 것은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애초 그런 일에 시간을 허비하시지 않았다. 그보다 하나님은 먼저 엘리야의 지치고 고갈된 몸부터 다루셨다. 즉 그냥 잠자게 두신 것이다. 그러다 먹고 마실 때가 되자 엘리야를 깨워 음식과 물을 주시고는 또 자게 하셨다. 그 뒤에도 이런 과정은 되풀이되었다. 이 같은 엘리야의 경험은 늘 내게 큰 위안이 된다. 고독과 침묵의 여정을 떠날 때 내게도 한 그루의 로뎀나무가 필요했다. 뼛속까지 스며든 피로에 굴복할 수 있는 곳, 피로가 내 삶에 대해 말해 주는 것을 들을..
빌립보서 3장 13절 말씀이다. 개인적으로 영어로 읽어야 좀 더 와 닿기에 NIV로 옮겨본다. "Brothers, I do not consider myself yet to have taken hold of it. But one thing I do: Forgetting what is behind and straining toward what is ahead." 많이 읽고 들었던 말씀이다. 그러나 오늘 목사님의 설교에서 새롭게 깨달아진 게 있었다. 설교를 듣던 중 갑작스럽게 떠오른 질문은 "What is 'what is behind'?"였다. 나도 모르게 나는 그 동안 아무런 이의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것을 그저 과거에 일어났던 안 좋은 사건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 잊고 싶은 기억들 정..
엘리야는 음식과 물로 다시 기력을 돋운 후 일어나 시내산이라고도 하는 호렙산으로 길을 떠난다. 그런데 왜 하필 호렙산인가? 삶의 여정과 영적 체험을 통해 엘리야는 그곳이 가능성의 장소임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열왕기상 19장을 보면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호렙산으로 가라고 하신 기록이 없다).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아쉬울 때 하나님을 만났던 곳이다. 그곳의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다. 또한 후에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 함께 가시리라는 것을 절실하게 알아야만 했을 때, 하나님은 그 산을 친히 지나가시며 모세에게 어디를 가든 함께 하시겠다는 확신을 주셨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고, 택하신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러므로 지구상에 하나님을 만날 희망을..
복음 전도에는 관계가 필수적이다. 예외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어릴적부터 익숙해져버린 전도 방법은 기묘하게도 그 예외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구하는 기적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런 기적이 단 한번만 일어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숱하게 많은 사람들과 허다하게 많은 그들의 시도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그러한 예외적인 일화들은 수치스럽게, 게다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효율적으로 느껴지는 그러한 전도 방법에 있어서 거의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예수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만이 구원의 필수 요소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예나 지금이나 충분한 논쟁거리가 되고도 남는다. 칭의와 성화와의 관계, 믿음과 행위와의 관계, 영과 진리와의 관계, 그리고 신앙와 삶과의 관계까지, ..
1. 하나님은 언약 관계 안에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도 해당되는 패턴이었다. 복은 자동적이거나 기계적인 것이 아니었다. 복은 하나님이 구속, 공급, 보호의 은혜 가운데 이미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모든 것에서 나왔다. 또한 복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에 언약적 순종으로 반응할 때만 나왔다. 구원의 복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언약적 순종의 반응이 필요했다. 2. 구약 성경에서 복이나 구원이 순종을 통해 얻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인 실수다. 그와 반대로, 복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에 의해 확립된 언약 관계에 기초한다. 그렇다면 순종은 복의 영역 안에 살면서 그 복을 누리는 방법이다. 순종은 복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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