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됨. 의당 교회는 이래야 한다는 둥, 목사는 이렇게 하면 더 좋았을 거라는 둥 떠들어대는 작자들과 얘기를 하는니, 차라리 시장 골목의 아줌마들과 어려운 살림살이를 가타부타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에 더 가까워지는 길일지도 모르겠다. 건물을 지어야 되니 대출까지 받아서 헌금하라고 암묵적으로 강요하고, 그렇게 하면 무슨 전무후무의 축복이라도 받을 것처럼 과장해서 떠벌리고, 이젠 건물 지어놨으니 사람을 채워야 한다며 전도대폭발이니 뭐니 하며 사람들 긁어모으라고 강요하는 그런 교회 안에서 무슨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기대할 수 있을까. 스스로 사람들의 인생과 동떨어지기를 자처하여 섬이 된 교회. 그것이 거룩함의 증거인 듯, 그 산 속에 외로이 떨어져 홀로 화려하기만한 건물. 거기에 가고 싶은 사람은 아마도 하나..
한 분, 다른 이름, 다른 모습. "But there I have another name. You must learn to know me by that name. This was the very reason you were brought into Narnia, that by knowing me here for a little, you might know me better there."― C.S. Lewis, 'The Chronicles of Narnia' 성장하여 이제 더 이상 나니아로 올 수 없는 루시와 에드먼드와의 마지막 작별 순간에 아슬란이 에드먼드의 질문에 했던 대답이다. 에드먼드는 아슬란을 현실 세계에서도 만날 수 있냐고 물었었다. 그러자 아슬란이 대답했다. 현실 세계에서 아슬란은 다른 이름을 ..
**김근주 교수님의 '복음의 공공성'을 다시 읽어가고 있습니다. 잠시 멈춰서서 묵상하다가 연구소를 오가는 셔틀 버스 안에서 써내려간 글입니다.** 일상.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에게 일상은 모든 것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들이 일상을 마치 뭔가 인생의 중요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과정이나 배경 정도로 하등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가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간과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그것은 곧 정착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가장 안정되고 화려한 정착을 꿈꾸는 우리들의 삶은 마치 맞지 않은 옷을 입고 그 사람처럼 살아가려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우린 기억해야 한다. 믿음의 조상, 복음의 시작인 아브라함도 나그네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중요한 건 정착을 잘했는지, 아직도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는지가 아..
프로의 인정. 며칠 전 일이다. 마침 Employee Evaluation 시즌이라 보스가 오피스로 날 불렀다. 1시간은 넘게 대화를 나눴다. 실험실 생활에서의 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보스가 바라보는 내 모습, 실험실의 다른 구성원들이 평가하는 내 모습이 어떤지 들었다. 대체적으로 난 좋은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단, 가끔씩 내게서 무뚝뚝함이 보이기 때문에 오해를 받기도 했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미국 온지 6년 반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무의식 중에서는 나의 한국스러운 옛 자아가 발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내 의도가 나쁘진 않았다고 다들 이해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내가 조금 신경을 써서 수정할 수 있다면 훨씬 더 좋을 거라고 보스가 친절하게 귀뜸해 주었..
**김회권 목사님의 ‘모세오경’을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어제 밤 창세기 32장까지 읽었네요. 책으로는 350페이지를 지나갑니다. 오늘은 상상의 나래를 펴서 얍복 강가로 가봅니다.** 얍복 강가로. 얍복 강가에서 야곱이 맞닥뜨린 건 그에게 씨름을 걸어온 어떤 사람 (야곱에게 축복을 줄 수 있던 존재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자나 천사로 이해함)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했던 건 자신의 옛 자아와의 만남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숙명적인 만남이 얍복 강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야곱이 두려워했던 이유는 에서가 자기를 죽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먼저 자신이 에서에게 죽임을 당할 만한 일을 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20년 만에 찾아온 불청객과도 같은 과거의 죄..
**김회권 목사님의 ‘모세오경’을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어제 밤 창세기 26장까지 읽었네요. 책으로는 300페이지 고지가 보입니다. 오늘은 상상의 나래를 펴 모리아 산으로 가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지켜봅니다.** 모리아 산으로. 누군가가 말했듯, 모리아 산 위에서 기절초풍할 만큼 가장 놀랐던 존재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아닌 하나님이었을 거라는 생각에 난 동의한다. 그리고 그 놀라웠던 짧은 순간에 함께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가장 안도의 한 숨을 내쉰 존재는 아마도 수풀에 뿔이 걸린 채 조용히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었던 또 다른 존재, 숫양이 아니었을까. 결박된 이삭을 잡으려고 칼을 높이 치켜들었을 때 아브라함을 성급히 부르시며 급제동을 거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모든 걸 다 아시고 어디에나 계신 ..
**김회권 목사님의 ‘모세오경’을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어제 밤 창세기 15장까지 읽었네요. 책으로는 200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전체의 1/7정도 읽었네요). 곱씹으며 묵상하며 상상하며 천천히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참 재밌습니다. 이럴 땐 제가 신학자가 아닌 일반 신자라는 사실이 참 좋습니다. 각인되어질 수도 있는 신학 사상에 제한받지 않고, 맘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도 있으니까요. 모두 알다시피 창세기 3-11장은 인간의 창조 후 타락, 그리고 증가되어지는 인간의 죄악이 시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들어서야 아브라함의 등장으로 드디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지요. 인간의 죄에 대해 많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단상을 글로 적어봤습니다. 만약 신학적으로 교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김회권 목사님의 '모세오경'을 읽으며 창세기 5장까지 왔습니다. 130페이지를 읽었으니 전체의 10분의 1도 읽지 않은 셈입니다. 성경이 재밌습니다. 읽고 묵상한 것을 글로 써 보았습니다. 그리고 페친들과 나누고 싶어서 여기에 올립니다.** 원죄. 창세기에 의하면,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인간은 선악을 판단하는 신적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얻어진 인간의 선악 판단력에는 진정한 선과 악에 대한 이해와 분별력이 없었다. 밝아진 눈으로 인간이 읽어낸 선과 악은 자기의 이익과 손해였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각자에게 주어진 일상의 조각들로부터 선과 악에 대한 이해와 분별, 그리고 판단을 하나씩 배워나가도록 디자인되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뱀의 개입으로 인해 선악과를 따먹어버림으로써 ..
모세오경. 거금을 들여 구입했으나 책장에 고스란히 한 자리 차지하며 꽂혀있던 김회권 목사님의 모세오경을 읽기 시작했다. 성경 1년 1독을 목표로 했지만, 이런 책들과 함께 읽어나가다 보면 목표에 이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성경을 수차례 읽었던 내게 필요한 건 몇 번 더 읽느냐가 아니라, 한 번을 읽더라도 더 깊고 넓은 눈으로 성경을 이해하여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것일테다. 성경을 읽는 이유는 내 경건생활이나 목표 달성이 아닌,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이니깐. 단지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하나님을 많이 아는 것도 아니니깐. 천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어마어마한 부담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재밌다. 달다. 덕분에 앞으로 다른 책 읽는 시간이 줄어들겠으나, 바른 방향에 접어든 기분이다.
생물.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자극을 받았을 때 반응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자극이 주어졌는데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는 했지만 그 자극을 처리하는 과정이 잘못되거나, 처리과정은 문제가 없었지만 반응과정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생물은 건강한 게 아니라 병든 것이다.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다. 교회 안에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는데도 쉬쉬하며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냥 넘어가는 현상을 과연 나는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문제를 문제로 인지하지 못하는 교인들, 인지는 했지만 처리과정이나 반응과정이 왜곡되거나 결핍되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교인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눈치 보며 안절부절하며 침묵을 지켜야만 하는 무언의 분위기에 압도되는 교인들을 난 어떻게 이해해야..
실제적인 것. 차라리 번쩍번쩍하지 않다면, 차라리 최신식 건물과 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차라리 사람들이 보고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만큼 초라한 외형을 가진 교회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 안에서 이뤄지는 예배 의식들을 잘 치러내는 것만이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것처럼 당당히 여겨지고 또 암묵적으로 강요되어지기까지 하는 교회 안에는 화려함과 웅장함은 있을지언정 사랑은 느껴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높은 곳에 계셔 가장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자를 선별하여 복을 더 많이 주시는 하나님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그들이 뽐내는 거룩함?의 배후엔 당연히 조용한 경쟁논리가 자리잡을 수밖에 없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많은 돈을 헌금한 교인들이나, 새벽기도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결석하지 않고 목..
"성경에 모든 진리가 담겨 있습니까?"(** 여기서의 '진리'란 자연법칙과 세상원리 등을 포괄한 넓은 의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는 사람들은 네 부류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Yes 라고 하는 사람, 머뭇거리다가 Yes 하는 사람, 망설이다가 겨우 No 하는 사람, 그리고 단번에 No 라고 대답하는 사람. 당신은 어느 부류인가? 근본주의자라면 첫 번째, 자유주의자라면 네 번째일 것이라는 짐작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머뭇거리는 두 번째와 세 번째에 속하리라 생각한다. 심사숙고하느라 머뭇거리진 않을 것이다. 확신이 서지 않거나 주위의 눈치를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의 생각이란 게 애당초 없었거나, 이런 것들은 의심하거나 감히 질문하면 천벌을 받거나 저주를 받을 거라는..
복음의 공공성, 거룩한 소식. **김근주 (Keunjoo Kim) 교수님 책이 수상됨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최근 라인홀드 니버를 읽다가 복음의 공공성과 거룩함에 대해 아마추어적으로 묵상한 것을 글로 적어봄. 복음의 공공성이 중요한 이유는 라인홀드 니버가 간파한 개인과 집단의 차이를 고려하면 더욱 선명해진다. 니버는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집단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집단은 마치 희망이나 자정능력이 상실된 또 하나의 구제불능의 존재인 것이다. 니버가 보기엔 집단 이기주의가 제어되기 위해서는 개인 차원의 교육이나 윤리 따위론 어림도 없었다. 실제 역사적으로도 그의 예언자적인 통찰은 이미 여러차례 검증이 되었다. 현실주의적인 차원에서 니버는 백번 옳았다. 복음이 사적인 영역으로 꼬리를 감춘 건 이미 ..
사실 우리는 떠밀린다. 시대의 조류에, 그리고 속한 국가와 공동체와 가정 안에 보이지 않게 흐르는 기류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잘 인지하지 못할 뿐, 우린 모두 그 흐름에 떠밀리며 산다. 어쩌면 인간의 지혜란 떠밀리는 흐름 속에서도 가능한 한 영향을 덜 받게 해 주는 노하우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이성적인 생각으로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지라도 떠밀리는 프레임 안이다. 뛰어봐야 벼룩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지만, 사실 인간은 전체 프레임을 지각할 수도 없는 미개한 존재일 뿐이다. 어딘가에 위치해 있지만, 그 위치가 전체 프레임 안에서 어떤 좌표를 가지는 지는 알 수 없다. 마치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함에도 우리가 전혀 회전력을 ..
뜻은 높고 마음과 생각은 항상 위를 향하지만, 일상이란 공간으로 내려오면 우린 하나의 육을 가진 똑같은 인간이다. 생계를 유지하려 오늘도 일터에서 땀을 흘린다. 자신은 굶어도 자식들 목구멍에는 뭐라도 넣어줘야 하는 의무감에 눌린다. 의도치 않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는 이상,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이다. 일상은 결코 높지 않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일상의 대기는 낮고 천한 곳에 고이는 법이다. 낮은 곳에 임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세리와 창녀의 친구가 되시는 예수님을 찬양한다. 높은 곳의 의인이 아닌, 낮은 곳의 죄인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찬양한다. 구원은 낮은 곳에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은, 그 거룩한 삶은, 하나님나라가 우리의 높은..
| 안도감은 산산이 부서지고 자력 구원의 수단으로 삼았던 끈은 끊어진다. 한때의 열심이 사라지고 나면, 약점과 불성실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자기의 영적인 키에 단 1cm도 더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불만족의 기나긴 겨울이 시작되고 마침내 우울과 비관주의와 드러나지 않는 교묘한 절망 등이 전개된다. 교묘하다 함은 이 절망이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되어 누구도 이것을 문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절망과 비관은 권태와 고역스러움의 형태를 띤다. 삶의 일상성, 하고 또 해도 여전히 매일 계속되는 의무 등에 우리는 압도되고 만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은 지나치게 요구가 많다. 성령께 순복한다는 것은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다.’라는 생각을 허용하고 만다. 그리고 다른..
실내가 춥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데 그 때, 잠시만이라도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보면, 오히려 실내가 더울 뿐 아니라 환기가 필요하다는 생각까지도 하게 된다. 정체됨은 우리를 가두고 옹졸하게 만들 뿐 아니라 이기적으로도 만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곳은 결국 악취가 나게 되어 있으며, 신선한 공기의 유입이 없는 한 그 나라의 왕은 혼자만 느끼는 추위에 불평하고 고통받다가 파멸에 이르고야 만다. 자신의 왕국이 더할 나위 없이 편한 이유는 자기 맘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기는 아쉽게도 제한되어 있다. 정체된 대기에서는 열렬히 호흡할수록 산소의 양은 더 빨리 줄어드는 법이다. 새로운 산소는 외부에 있다. 살고 싶다면 편함을 버리고 밖으로 나가든지 튼튼히 쌓아올린 성벽을 허물고 외부의 신선..
고독은 잠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나를 떠나는 여행. 단, 이 여행은 길지 않아야 하고, 또한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독의 의미는 곧 방황이 되기 때문이다. 잠시 나를 떠나 다시 날 찾는 것, 여기에 고독의 참된 의미가 있다. 고독은 우릴 낯선 곳으로 인도하기도 하지만, 때론 익숙함으로도 우릴 이끈다. 언젠가 머리를 통하지 않고도 벌컥 알게 되었던 그 느낌, 그 냄새, 그 감촉. 과거의 나와의 데자뷰.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과거의 상처나 그에 대한 치유, 아니면 욕구의 불만족 등으로 설명을 하겠지만, 이것 역시 생물학자인 난 자가항상성의 일환으로 본다. 구체적인 원인은 모르지만, 내 몸이, 내 마음이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것이 치유를 목적으로 하든, 그저 추억에..
스프링복의 비극은 매번 들어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무리를 지어다니는 스프링복은 신선한 풀을 먼저 뜯어 먹기 위하여 달리기 시작한다. 경쟁이다. 안간힘을 쓰지 않으면 풀을 먹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절력 질주를 하다가 그들은 그만 벼랑 끝에서 떨어져 몰살을 맞이한다. 그들의 빠른 속도는 관성의 법칙으로 하여금 제동 능력조차 거뜬히 이겨버리게 만든 것이다. 선두에서 잠깐 승리의 쾌감을 맛보며 달리던 놈들이나, 그 뒤를 따라 똥줄 빠지듯 달리던 놈들이나, 벼랑을 만났을 때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몰살 전 그들은 이미 목적을 상실했으리라 생각한다. 자신들이 왜 뛰고 있는지, 왜 더 빨리 뛰어야만 하는 것인지 잊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바로 경쟁 사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예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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