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험가들이 동굴 속에 갇혔다. 마침 다행스럽게도 물에 잠긴 좁은 통로가 보인다. 그 통로 끝으로 빛이 보인다. 물 밖으로 나가서 통로를 지난다면 도움을 청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한 사람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를 먼저 보낸다. 이 때, 한 사람 선택의 요점은 그 사람만 구조받도록 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나머지 모든 사람들의 구조를 위함이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을 선택함은 나머지를 거부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들 모두를 위한 선택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한 민족,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만을 구원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창세기 12:1-3에 명시되어 있듯이,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고 부르신 것은 모든 열방을 위한 하나님의 선교에 도구로 쓰시기 위함이다. 창..
창조로 시작하여 새창조로 끝나는 하나님 선교 여정의 큰 틀 안에서, 인간의 반역으로 인한 죄의 시작, 악의 창궐,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으로써 아브라함 언약을 이야기 해주고, 수세기 동안 비밀이었던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가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해주는 과정이 복음 전도에 있어서 핵심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시지만, 인간은 죄에 빠져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고, 다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선 유일한 길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는 사영리의 가르침은 뭔가 많이 빠져 있다는 느낌이다. 예수님의 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 성경에서만 읽어낼 수 있는 하나님의 선교 여정과 아브라함 언약..
한국 교회를 포함한 세계 교회의 현 상태에 대한 불평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모두가 불평을 한다. 우리는 도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세계의 제도적 교회들이 하나님의 요구 조건은 고사하고 우리의 이상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주장하는 선교를 저해하는 주요 장애물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도덕적 상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소돔을 심판하셨다. 우리는 주변에서 여전히 소돔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백성을 부르셔서 다른 존재가 되도록, 다른 기준에 따라 살도록, 그래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하셨다. 우리의 문제는 너무나 자주 교회가 세상과 전혀 다르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을 통해 구속하셨을 때,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속박 상태의 몇몇 차원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실제로 모세가 바로에게 특별히 요청한 것은 이스라엘이 가서 그들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미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사명을 주신 바로 그 산에서 이스라엘이 자신을 예배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출애굽은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 상태에서 언약으로 이동하는 사건이었다! 구속은 구속자와의 관계를 위한 것이었다. 구속은 세상 속에서 그분의 관심사와 목적을 섬기기 위함이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 저, '하나님 백성의 선교' 중 6장, '구속적 삶을 살도록 구속받은 ..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나를 사망에서 건지시고 자녀로 삼아 주셨는지. 주님의 사랑의 빛에 마음 문을 여니 온통 죄의 흔적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제야 깨닫습니다. 나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걸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나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단 걸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성취된 하나님나라 안에 거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함께 하셔서 나를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하심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만민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나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나를 성령으로 인도하소서.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내 안의 믿음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하시고 기쁨으로 순종하게 하소서. 나의 순종이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
1. 우익의 복음 기독교의 복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죽으셨고 우리는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답할 것이다. "구속"의 한 이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 이런 식으로 예수의 본질적 메시지의 전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믿음이 보장하는 유일한 결과는 "단지 용서받는 것"이 되고 만다. 우익의 복음에서는, 믿음의 절대적 표시가 되는 행동도 없고 그렇다고 믿음에 의해 절대적으로 배제되는 행동도 없다. 오직 믿음 이외에 뭔가가 더 있어야 된다는 주장은 순전한 은혜에 "행위"를 더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우익 입장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천국 입성의 "길"을 마련해 주셨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사후..
요즈음 목회자들은 공정한 탐구를 통해 알려진 것과 알 수 있는 것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믿도록 되어 있는 것 (어쩌면 우리가 믿는 편이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잘못 비춰지고 있고, 목회자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가정하에 청중으로 하여금 그것을 믿게 하는 것 - 또는 거기에 헌신하게 하거나 적어도 고백하게 하는 것 - 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식에 기초하지 않은 믿음과 헌신과 고백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회심자들"을 보면 그들의 "신앙"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지 않고 있으며, 그들의 "기독교"는 두려움으로 채색된 사회적 순응의 종교에 불과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시키려고 ..
아버지만이 나를 죄와 악으로부터 구원해 줄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는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늘 추구하고 관심 있어 하시는 부분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관심조차 없다면, 그 아들이 진정 아버지를 안다거나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단지 자신이 구원자라는 사실을 인정받는 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원하는 전부일까? 아니다. 나도 한 아들의 아버지라서 단호히 말할 수 있다. 절대 아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한다 (여기엔 아들의 조건이 문제되지 않는다. 그저 사랑이라는 자체가 아버지와 아들 관계의 시작점일 뿐이다).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지만 그 은혜는 사랑에서 시작한다. 고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구원을 넘어서는 더 큰 의미를 가진다. 혼자서는 사랑이 불가능하다. 사랑 받을 대상이 존재해야..
어떤 것이 신뢰할만하다는 논리/과학적인 입증이 이루어진 후에야 비로소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먼저, 믿음과 신뢰의 순서가 뒤바뀌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뢰는 믿음 이후에 체득해 나갈 수 있는 열매이지, 믿음을 갖기 위한 근거/조건/이유가 아니다. 우린 물리학적인 중력의 법칙을 믿는다. 왜냐하면 어린아이조차 중력이 무엇인지 설명만 해준다면 일상에서 자신이 중력을 늘 체험하고 있고 그 힘에 제한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직접 체험했고 남들도 체험했으므로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이러한 사실이 인간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객관성이 결여된다면 신뢰는 불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이 사회에서 배운 믿음과 신뢰의 ..
우리 눈에는 모세의 40년 광야 생활이나 아브라함의 오랜 광야 생활이 시간 낭비처럼 보일 수 있다. 인생의 목적이 단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성취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기간이 견디기 어려운 인고의 시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기나긴 시간을 통해 당신의 사람들을 성장시켜 가셨다. 그래서 난 믿는다.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에 작업하시는 과정은 나에게 좋은 것임이 분명하고 나는 이 과정을 통하여 한층 더 성장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의 목적은 어떤 일을 효율적으로 끝내는 것에 있다고 치자면, 어쩌면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과정이라 부르는 것에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일을 훌륭하게 끝마쳐서 공로를 인정받는 것이 ..
우리 가운데 많은 이가 한두 번은 함몰 웅덩이와 같이 자신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피곤으로 무감각해진 정서, 처절한 실패감,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목표에 대한 쓰디쓴 환멸감 등을 느낄 때, 우리 안에서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감지했을 것이다. 삶 전체가 온통 끝없는 심연으로 빠져 들어갈 것 같은 붕괴 직전의 위기를 느끼게 된다. 어떤 때는 그러한 붕괴를 피할 길이 거의 없어 보인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이 문제에 대해 한참 숙고해 보면 이전에는 몰랐던 우리 안의 영역, 즉 내면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내면 세계를 무시할 경우 우리를 짓누르는 사건과 스트레스의 무게를 오래 지탱할 수 없음이 점차 분명해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이런 사실을 발견하고..
그동안 난, 길거리에 나가거나 어떤 특정한 사람을 만나서 참된 복음을 전달했을 때 우리를 피하거나 우리에게 욕을 해대는 사람들의 반응이 핍박인 줄 알았다. 그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한통 속으로 몰아넣어 비겁한 이중적인 사람들의 단체로 말하는 사람들이 핍박자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거짓에 기반한 세상 권세 잡은 자들로부터 부당한 대우와 차별을 통한 멸시와 천대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 전도자들이 맡은 바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참 핍박과 고난임을 깨닫는다. 빛은 빛들이 모인 조명상사에만 머물면 그저 자기 모양새와 기능에 모든 관심이 기울어져 물건을 사러 온 사람들로부터 선택받기만을 바라는 법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약한 빛이라도 어둠에 놓이게 되면 비로소 원래의 기능..
초대교회에서 보이던 기적이 우리에겐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우리의 경험과 지식에 근거한 확률통계론적인 계산이나 자신만의 직감에 의존하여 내린 선택 때문이다.우리 인간은 육신의 눈에 너무나도 명백해 보이는 낮은 가능성에 좀처럼 몸을 맡기지 않는다.안타깝게도 이는 하나님을 믿는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에게도 마찬가지다.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기 싫으신 것도 아니고, 기적을 일으키실 능력을 상실하신 것도 아니다.다만, 우리가 믿음이 아닌 우리의 경험과 직관에 따른 결정을 내림으로써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실 기회를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기적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몸을 100% 맡길 때 일어날 수 있다. 물론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상관없는 상태가 된다. 기적을 바라고 그 선택을 ..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가 된 건, 비단 용모가 아리따웠기 때문만이 아니라, 원래 왕후였던 와스디가 왕의 명령을 어겨서 다시 왕후를 뽑아야 하는 일이 먼저 생겼기 때문이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포함한 모든 유대인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왕의 허락까지 받고 공식적으로 유대인 말살 음모를 열심히 꾸밀 때, 에스더가 초대한 첫번째 잔치가 끝나고 두번째 잔치날이 오기전, 왕은 평상시와는 달리 잠이 오지 않았고, 뜬금없이 역대 일기를 읽게 되고, 모르드개가 왕의 암살 음모를 고발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 대우하는 방법을 하만이 제안한 그대로 하만이 시행하도록 한다. 이때 이미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일 나무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히..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을 미리 갈라놓으시고 건너게 하신 것이 아니었다. 여호수아 3장 15-16절 말씀에는,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담대히 두려움을 이기고 발을 내딛을 때 요단이 갈라지는 것을 직접 체험하게 하신 것이다. 구하는 기도만이 기도가 아니듯, 기도는 책상에 앉아 거룩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열변을 토하는 것만이 아니다. 찾고, 두드리는 행위가 반드시 따라와야만 진정한 기도가 된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소원이 담겨 있는 언약적 기도이며, 반드시 응답되어지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해서, 아직 갈라지지 않고 물이 가득찬 ..
애굽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해방받고 광야에서 40년이란 세월을 보낸 후,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정복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다. 바로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이미 다 만들어놓은 후 들어와서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복할 당시 가나안 땅은 말 그대로 죄가 가장 관영한 곳이었다. 가장 어두운 곳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가면 가나안이라는 가장 어두운 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장 이상적인 곳으로 변화되는 것을 직접 체험하게 하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어느 땅에 머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느 땅에 머물든지 누가 통치하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성스러운 장소가 지정학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 ..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
은혜로운 말을 듣고, 은혜로운 글을 읽고, 또 은혜로운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많은 것을 얻는다. 때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큰 위로와 기대하지도 않았던 답을 얻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은혜로운 만남은 하나님 자녀들에게 있어서 큰 축복이며, 절대 게을리해서는 안되는 소중한 양식과도 같다. 그러나 이런 은혜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도, 우리는 인간이기에 거기서 안주해 버릴 수 있다. 지속적인 은혜로운 만남은 그러한 만남을 더욱 사모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사모하는 마음이 자신의 도피처 정도로 끝나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받고 어려운 문제에 대한 답을 얻었고, 그래서 괜찮아졌지만, 우리 인간은 그 괜찮아진 시점부터 다시 상처받고 어려운 문제에 빠지기 전의 ..
https://www.youtube.com/watch?v=y1RQciil7B0 What fortune lies beyond the stars Those dazzling heights too vast to climb I got so high to fall so far But I found heaven as love swept low My heart beating My soul breathing I found my life When I laid it down Upward falling Spirit soaring I touch the sky When my knees hit the ground What treasure waits within Your scars This gift of freedom gold ca..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아마도 살면서 인간이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흔한 질문 중 하나가 아닐까. 그리고 특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더 진지하게 더 많이 하진 않을까. 좀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교회 다니면서도 여전히 종교생활하고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 "다른 복음", 즉 본의 아니게 "복음" 아닌 "종교" 전달자가 되어버린 사람들로 그 비중을 국한시킬 수 있지 않을까. 고난과 훈련의 유익함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교과서는 아마 '욥기'가 아닐까 한다. 하나님과 사단과의 대화 가운데 왜 욥이 고난받게 되는지를, 욥기의 시작부터 우리 독자들은 쉽게 알 수 있지만, 정작 불가항력적인 고난을 실제로 받았던 욥은 그 고난이 끝난 이후에도 그 이유를 몰랐다. 다만, 그 고난으로 인하여 욥은, 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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