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가 고독과 침묵에 들어가 처음 부딪쳐야 했던 것은 자기가 모든 면에서 몹시 피곤하고 고갈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로뎀나무 아래 드러누워 잠들었다. 그런 그를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다루는 것은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애초 그런 일에 시간을 허비하시지 않았다. 그보다 하나님은 먼저 엘리야의 지치고 고갈된 몸부터 다루셨다. 즉 그냥 잠자게 두신 것이다. 그러다 먹고 마실 때가 되자 엘리야를 깨워 음식과 물을 주시고는 또 자게 하셨다. 그 뒤에도 이런 과정은 되풀이되었다. 이 같은 엘리야의 경험은 늘 내게 큰 위안이 된다. 고독과 침묵의 여정을 떠날 때 내게도 한 그루의 로뎀나무가 필요했다. 뼛속까지 스며든 피로에 굴복할 수 있는 곳, 피로가 내 삶에 대해 말해 주는 것을 들을..
빌립보서 3장 13절 말씀이다. 개인적으로 영어로 읽어야 좀 더 와 닿기에 NIV로 옮겨본다. "Brothers, I do not consider myself yet to have taken hold of it. But one thing I do: Forgetting what is behind and straining toward what is ahead." 많이 읽고 들었던 말씀이다. 그러나 오늘 목사님의 설교에서 새롭게 깨달아진 게 있었다. 설교를 듣던 중 갑작스럽게 떠오른 질문은 "What is 'what is behind'?"였다. 나도 모르게 나는 그 동안 아무런 이의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것을 그저 과거에 일어났던 안 좋은 사건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 잊고 싶은 기억들 정..
엘리야는 음식과 물로 다시 기력을 돋운 후 일어나 시내산이라고도 하는 호렙산으로 길을 떠난다. 그런데 왜 하필 호렙산인가? 삶의 여정과 영적 체험을 통해 엘리야는 그곳이 가능성의 장소임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열왕기상 19장을 보면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호렙산으로 가라고 하신 기록이 없다).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아쉬울 때 하나님을 만났던 곳이다. 그곳의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다. 또한 후에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 함께 가시리라는 것을 절실하게 알아야만 했을 때, 하나님은 그 산을 친히 지나가시며 모세에게 어디를 가든 함께 하시겠다는 확신을 주셨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고, 택하신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러므로 지구상에 하나님을 만날 희망을..
복음 전도에는 관계가 필수적이다. 예외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어릴적부터 익숙해져버린 전도 방법은 기묘하게도 그 예외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구하는 기적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런 기적이 단 한번만 일어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숱하게 많은 사람들과 허다하게 많은 그들의 시도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그러한 예외적인 일화들은 수치스럽게, 게다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효율적으로 느껴지는 그러한 전도 방법에 있어서 거의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예수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만이 구원의 필수 요소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예나 지금이나 충분한 논쟁거리가 되고도 남는다. 칭의와 성화와의 관계, 믿음과 행위와의 관계, 영과 진리와의 관계, 그리고 신앙와 삶과의 관계까지, ..
1. 하나님은 언약 관계 안에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도 해당되는 패턴이었다. 복은 자동적이거나 기계적인 것이 아니었다. 복은 하나님이 구속, 공급, 보호의 은혜 가운데 이미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모든 것에서 나왔다. 또한 복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에 언약적 순종으로 반응할 때만 나왔다. 구원의 복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언약적 순종의 반응이 필요했다. 2. 구약 성경에서 복이나 구원이 순종을 통해 얻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인 실수다. 그와 반대로, 복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에 의해 확립된 언약 관계에 기초한다. 그렇다면 순종은 복의 영역 안에 살면서 그 복을 누리는 방법이다. 순종은 복을 ..
탐험가들이 동굴 속에 갇혔다. 마침 다행스럽게도 물에 잠긴 좁은 통로가 보인다. 그 통로 끝으로 빛이 보인다. 물 밖으로 나가서 통로를 지난다면 도움을 청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한 사람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를 먼저 보낸다. 이 때, 한 사람 선택의 요점은 그 사람만 구조받도록 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나머지 모든 사람들의 구조를 위함이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을 선택함은 나머지를 거부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들 모두를 위한 선택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한 민족,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만을 구원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창세기 12:1-3에 명시되어 있듯이,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고 부르신 것은 모든 열방을 위한 하나님의 선교에 도구로 쓰시기 위함이다. 창..
창조로 시작하여 새창조로 끝나는 하나님 선교 여정의 큰 틀 안에서, 인간의 반역으로 인한 죄의 시작, 악의 창궐,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으로써 아브라함 언약을 이야기 해주고, 수세기 동안 비밀이었던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가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해주는 과정이 복음 전도에 있어서 핵심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시지만, 인간은 죄에 빠져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고, 다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선 유일한 길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는 사영리의 가르침은 뭔가 많이 빠져 있다는 느낌이다. 예수님의 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 성경에서만 읽어낼 수 있는 하나님의 선교 여정과 아브라함 언약..
한국 교회를 포함한 세계 교회의 현 상태에 대한 불평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모두가 불평을 한다. 우리는 도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세계의 제도적 교회들이 하나님의 요구 조건은 고사하고 우리의 이상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주장하는 선교를 저해하는 주요 장애물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도덕적 상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소돔을 심판하셨다. 우리는 주변에서 여전히 소돔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백성을 부르셔서 다른 존재가 되도록, 다른 기준에 따라 살도록, 그래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하셨다. 우리의 문제는 너무나 자주 교회가 세상과 전혀 다르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을 통해 구속하셨을 때,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속박 상태의 몇몇 차원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실제로 모세가 바로에게 특별히 요청한 것은 이스라엘이 가서 그들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미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사명을 주신 바로 그 산에서 이스라엘이 자신을 예배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출애굽은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 상태에서 언약으로 이동하는 사건이었다! 구속은 구속자와의 관계를 위한 것이었다. 구속은 세상 속에서 그분의 관심사와 목적을 섬기기 위함이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 저, '하나님 백성의 선교' 중 6장, '구속적 삶을 살도록 구속받은 ..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나를 사망에서 건지시고 자녀로 삼아 주셨는지. 주님의 사랑의 빛에 마음 문을 여니 온통 죄의 흔적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제야 깨닫습니다. 나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걸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나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단 걸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성취된 하나님나라 안에 거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함께 하셔서 나를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하심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만민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나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나를 성령으로 인도하소서.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내 안의 믿음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하시고 기쁨으로 순종하게 하소서. 나의 순종이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
1. 우익의 복음 기독교의 복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죽으셨고 우리는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답할 것이다. "구속"의 한 이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 이런 식으로 예수의 본질적 메시지의 전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믿음이 보장하는 유일한 결과는 "단지 용서받는 것"이 되고 만다. 우익의 복음에서는, 믿음의 절대적 표시가 되는 행동도 없고 그렇다고 믿음에 의해 절대적으로 배제되는 행동도 없다. 오직 믿음 이외에 뭔가가 더 있어야 된다는 주장은 순전한 은혜에 "행위"를 더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우익 입장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천국 입성의 "길"을 마련해 주셨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사후..
요즈음 목회자들은 공정한 탐구를 통해 알려진 것과 알 수 있는 것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믿도록 되어 있는 것 (어쩌면 우리가 믿는 편이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잘못 비춰지고 있고, 목회자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가정하에 청중으로 하여금 그것을 믿게 하는 것 - 또는 거기에 헌신하게 하거나 적어도 고백하게 하는 것 - 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식에 기초하지 않은 믿음과 헌신과 고백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회심자들"을 보면 그들의 "신앙"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지 않고 있으며, 그들의 "기독교"는 두려움으로 채색된 사회적 순응의 종교에 불과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시키려고 ..
아버지만이 나를 죄와 악으로부터 구원해 줄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는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늘 추구하고 관심 있어 하시는 부분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관심조차 없다면, 그 아들이 진정 아버지를 안다거나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단지 자신이 구원자라는 사실을 인정받는 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원하는 전부일까? 아니다. 나도 한 아들의 아버지라서 단호히 말할 수 있다. 절대 아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한다 (여기엔 아들의 조건이 문제되지 않는다. 그저 사랑이라는 자체가 아버지와 아들 관계의 시작점일 뿐이다).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지만 그 은혜는 사랑에서 시작한다. 고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구원을 넘어서는 더 큰 의미를 가진다. 혼자서는 사랑이 불가능하다. 사랑 받을 대상이 존재해야..
어떤 것이 신뢰할만하다는 논리/과학적인 입증이 이루어진 후에야 비로소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먼저, 믿음과 신뢰의 순서가 뒤바뀌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뢰는 믿음 이후에 체득해 나갈 수 있는 열매이지, 믿음을 갖기 위한 근거/조건/이유가 아니다. 우린 물리학적인 중력의 법칙을 믿는다. 왜냐하면 어린아이조차 중력이 무엇인지 설명만 해준다면 일상에서 자신이 중력을 늘 체험하고 있고 그 힘에 제한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직접 체험했고 남들도 체험했으므로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이러한 사실이 인간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객관성이 결여된다면 신뢰는 불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이 사회에서 배운 믿음과 신뢰의 ..
우리 눈에는 모세의 40년 광야 생활이나 아브라함의 오랜 광야 생활이 시간 낭비처럼 보일 수 있다. 인생의 목적이 단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성취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기간이 견디기 어려운 인고의 시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기나긴 시간을 통해 당신의 사람들을 성장시켜 가셨다. 그래서 난 믿는다.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에 작업하시는 과정은 나에게 좋은 것임이 분명하고 나는 이 과정을 통하여 한층 더 성장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의 목적은 어떤 일을 효율적으로 끝내는 것에 있다고 치자면, 어쩌면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과정이라 부르는 것에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일을 훌륭하게 끝마쳐서 공로를 인정받는 것이 ..
우리 가운데 많은 이가 한두 번은 함몰 웅덩이와 같이 자신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피곤으로 무감각해진 정서, 처절한 실패감,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목표에 대한 쓰디쓴 환멸감 등을 느낄 때, 우리 안에서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감지했을 것이다. 삶 전체가 온통 끝없는 심연으로 빠져 들어갈 것 같은 붕괴 직전의 위기를 느끼게 된다. 어떤 때는 그러한 붕괴를 피할 길이 거의 없어 보인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이 문제에 대해 한참 숙고해 보면 이전에는 몰랐던 우리 안의 영역, 즉 내면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내면 세계를 무시할 경우 우리를 짓누르는 사건과 스트레스의 무게를 오래 지탱할 수 없음이 점차 분명해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이런 사실을 발견하고..
그동안 난, 길거리에 나가거나 어떤 특정한 사람을 만나서 참된 복음을 전달했을 때 우리를 피하거나 우리에게 욕을 해대는 사람들의 반응이 핍박인 줄 알았다. 그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한통 속으로 몰아넣어 비겁한 이중적인 사람들의 단체로 말하는 사람들이 핍박자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거짓에 기반한 세상 권세 잡은 자들로부터 부당한 대우와 차별을 통한 멸시와 천대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 전도자들이 맡은 바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참 핍박과 고난임을 깨닫는다. 빛은 빛들이 모인 조명상사에만 머물면 그저 자기 모양새와 기능에 모든 관심이 기울어져 물건을 사러 온 사람들로부터 선택받기만을 바라는 법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약한 빛이라도 어둠에 놓이게 되면 비로소 원래의 기능..
초대교회에서 보이던 기적이 우리에겐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우리의 경험과 지식에 근거한 확률통계론적인 계산이나 자신만의 직감에 의존하여 내린 선택 때문이다.우리 인간은 육신의 눈에 너무나도 명백해 보이는 낮은 가능성에 좀처럼 몸을 맡기지 않는다.안타깝게도 이는 하나님을 믿는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에게도 마찬가지다.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기 싫으신 것도 아니고, 기적을 일으키실 능력을 상실하신 것도 아니다.다만, 우리가 믿음이 아닌 우리의 경험과 직관에 따른 결정을 내림으로써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실 기회를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기적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몸을 100% 맡길 때 일어날 수 있다. 물론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상관없는 상태가 된다. 기적을 바라고 그 선택을 ..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가 된 건, 비단 용모가 아리따웠기 때문만이 아니라, 원래 왕후였던 와스디가 왕의 명령을 어겨서 다시 왕후를 뽑아야 하는 일이 먼저 생겼기 때문이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포함한 모든 유대인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왕의 허락까지 받고 공식적으로 유대인 말살 음모를 열심히 꾸밀 때, 에스더가 초대한 첫번째 잔치가 끝나고 두번째 잔치날이 오기전, 왕은 평상시와는 달리 잠이 오지 않았고, 뜬금없이 역대 일기를 읽게 되고, 모르드개가 왕의 암살 음모를 고발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 대우하는 방법을 하만이 제안한 그대로 하만이 시행하도록 한다. 이때 이미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일 나무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히..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을 미리 갈라놓으시고 건너게 하신 것이 아니었다. 여호수아 3장 15-16절 말씀에는,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담대히 두려움을 이기고 발을 내딛을 때 요단이 갈라지는 것을 직접 체험하게 하신 것이다. 구하는 기도만이 기도가 아니듯, 기도는 책상에 앉아 거룩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열변을 토하는 것만이 아니다. 찾고, 두드리는 행위가 반드시 따라와야만 진정한 기도가 된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소원이 담겨 있는 언약적 기도이며, 반드시 응답되어지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해서, 아직 갈라지지 않고 물이 가득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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